믿음의 형제/정치인들의 작태

국민은 당신들을 버렸다

핵무기 2014. 9. 3. 10:17

국민은 당신들을 버렸다



국민은 당신들을 버렸다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교수

 

지역주의 안주 반사이익 노리며 부정의 게임 몰두한 새정치연..
국민에게 진보-개혁 꿈 접게한 당신들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왜 선거에 졌는지 묻지마라, 다음에 어떻게 이길지 묻지마라,
왜 버림받게 됐는지를 물어라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교수

 

욕먹을 짓을 하나 하자.
초상집에 불 지르고, 다리 부러진 사람 걷어

차는 짓을 한 번 하자. 선거에 져 반쯤 죽어 넘어진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해서 말이다.

당혹스러울 것이다. 자괴감도 들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불통과 독단이 이렇게 심한데
어떻게 새누리당에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나”
“이겨야 할 선거에서 졌다”는 당 대표의
사퇴의 변에서 당신들의 심정을 읽는다.
국민들에 대한 섭섭함도 있을 것이다.

 

전남 순천-곡성에서까지 패하다니.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 탐이 나더냐?”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의 이수일이
상대방 당선자의 ‘예산폭탄’ 공약을 떠올릴 것이다.
당신들의 이런 모습이 딱하다. 단순히 졌다는 게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기고 지고 이전에 국민은 이미 당신들을 버렸다. 더이상 당신들을 희망과 미래의 길이라 보지 않게 됐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

 

선거 이전에 당신들은 이미 버림받은 몸이었다.
버림받은 몸으로도 이길 수는 있었다. 상대의 잘못에 따른 반사이익을

볼 수도 있었고 어쩌다 부는 바람의 덕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권력 졸부’ 이상 뭐가 되었겠나.

 

국민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을 것이고, 이겨 얻은 그 권력이 뭔지도모르고 좌충우돌하다 다시 역사의 심판대 위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져도도 불행이고 이겨도 불행이었다.
그래서 말한다. 왜 졌느냐 묻지 마라. 어찌하면 다음에 이길 수 있을까도 묻지 마라. 지도부의 공천이 어떠했느니, 투표율이 어떠했느니 따위는
입에 올리지도 마라.

 

버림받은 몸에 이기고 지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지금이라도 제대로 물어라. 왜 버림받게 되었는지를 물어라.
이기고 지고에만 연연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또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국민 운운하며 고개를 들고 다녔던 날들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폐부를 뚫고 들어올 때까지 묻고 또 물어라.
진보 개혁을 표방하는 정당의 생명력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국민을 꿈꾸게 하는 데 있다.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설득력 있는 비전과 대안을 만들고,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꿈을 만들고, 팔고, 또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보 개혁 쪽에 그런 능력이 없을 때 사람들은 익숙한 곳, 즉 보수

쪽을 향한다.” ‘자본주의 4.0’을 쓴 아나톨 칼레츠키의 말이다.

 

그래서 진보 개혁 쪽은 보수 쪽보다 어렵다.
전자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팔아야 하지만,
후자는 이를 부정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진보 개혁 쪽이 보수 쪽의 전략을 따라가서는 안 되는 이유이자,
역사와 현실 앞에 더 진지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떠했던가. 지역기반에 안주해 상대를 욕하며
그 반사이익이나 노리는 게 고작이었다. 보수 쪽보다 더 부정의

게임에 골몰해 오기도 했다.

꿈을 만들어 파는 정당이 아니라 비난과 소음의 정당이 되어 왔다.
그러다 국민의 눈길이 차가워지면 이 집단 저 집단 끌어들여 분칠을 했다.

어떤 꿈을 가졌는지, 또 그 꿈을 팔 수 있는 능력은 있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그 결과 당신들은 정치적 리더십도, 정책적 리더십도 없는 오합지졸이 되었다. ‘진보’와 ‘개혁’은 물론이고 ‘새 정치’나 ‘민주주의’ 같은 고귀한 언어들도 당신들 입에 오르내리는 순간 불량 정치의 조악한 장식품이 되었다.
이런 당신들을 국민은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비통한 심정으로 당신들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다. 그리고

그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 진보 개혁에 대한 기대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까지 접으며 말이다. 슬프다. 가슴이 찢어진다.

 

당신들이야 어찌되든 좋다. 하지만 그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에, 힐끗힐끗 뒤돌아보는 그들의 젖은 눈길에 가슴이 미어진다.

 

그 처진 어깨와 젖은 눈길을 보며 묻는다. 당신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진보와 개혁의 꿈을 접게 한 죄가 얼마나 큰지, 또 그것이 불러 올 문제들이 얼마나 큰지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그러고도 졌다는 사실에만 당혹해 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또 뭔가.
용서할 수 없다. 선고를 내리자면 사형, 즉 문을 닫게 하는 것이다.
힘이 없어 집행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말 당신들의 그 뿌리 깊은 기득권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히려 빈다. 무릎 꿇고 애원한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하라.
왜 졌나가 아니라 왜 버림받았는지부터 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