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역사속의 인물들

김종필의 증언

핵무기 2015. 4. 13. 16:20
1952년 8월부터 53년 5월까지 당시 김종필 대위는 6사단 19연대
수색중대장으로 강원도 금성 구두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김 대위가 81㎜ 박격포 발사를 준비하는 장면.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박정희에겐 좌익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JP는 6·25 개전초기 박정희가 좌익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갖게됐다.

JP가 확보한 흔들리지 않는 증거는 무엇일까.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됐다.

나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중위)이었다.

며칠 전부터 휴전선 쪽 적정(敵情)이 크게 불안했다.

6월 24일 밤 나는 정보국 당직을 자처했다.

밤새 뜬눈으로 전쟁을 맞았다.

 대비 없이 맞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오판은 우리가 했다.

육군 정보국은 적의 동향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인 박정희와 우리 전투정보과는

적정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군과 정부의 수뇌들은 이를 불신했고 활용할 줄 몰랐다.

우리는 적을 알고서도 당한 것이다.

27일 밤 적의 탱크가 서울 미아리에 출몰하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졌다.

육군본부는 그날 경기도 시흥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적정을 파악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 없이 바빴다.

28일 자정을 넘긴 새벽, 지하 벙커에서 일하다 나와 보니

상황장교와 사병 몇 명만이 보였다.

육본 수뇌부는 임시본부가 차려질 수원을 향해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병기감실 앞에 GMC 트럭이 보였다.

차에 올라 키를 꽂아보니 시동이 걸렸다.

 나는 그 트럭을 몰아 육사 8기생인 동기 몇 명을 태우고 길을 나섰다.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를 200m쯤 남겨둔 지점이었다.

그때 앞에서 번쩍하더니 큰 폭발음이 일었다.

한강 인도교에는 피란을 가려는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무엇인가가 후두둑 떨어져 내 얼굴에 묻었다.

사람들의 피와 살점이었다.

내가 몰던 차가 조금만 일찍 인도교에 진입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등에 식은 땀이 났다. 우리는 차를 버리고 서빙고 나루를 향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바지선으로 우리를 건네 주었다.

남쪽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노를 젓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꼭 돌아들 와, 꼭 돌아오라구….”

서울을 탈환해 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

우리는 강을 건넌 뒤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걸었다.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내려갔다.

육군본부는 수원 농업시험장에 미리 자리를 잡은

미군 군사고문단과 합류해 움직인다는 계획이었다.

전황(戰況)은 제대로 알 길이 없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언제 한강을 넘어 내려올지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조국이 백척(百尺)의 간두(竿頭)에서 흔들리고 있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새벽의 어둠을 헤치며 걷고 또 걸었다.

나는 하나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박정희 문관은 돌아올 것인가?

 전쟁이 터지자 박정희 문관의 좌익 문제가 내게 다시 다가왔다.

1949년 군 내부의 남로당 연루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숙군(肅軍) 때였다.

박정희 소령은 사형의 위기에 처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군복을 벗고

정보국 문관(작전정보실장)으로 근무하면서 우리와 만났다.

 그는 우리가 존경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말이 없어 과묵한 인상이었다.

업무는 정밀했고 사고는 조직적이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우리였지만 ‘박정희가

이념적으로 어떤 사람인가’에 관한 의구는

전부 해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박정희 실장의 행방이 점점 궁금해졌다.

그는 전쟁이 터질 때 모친의 1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 경북 구미에 내려가 있었다.

6·25가 발발한 그날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구미경찰서에서 전화를 건다는 그는 “서울에 올라가려는데,

당최 가는 교통편이 없다. 정보국장에게 보고해 달라”고 했다.

27일 오전 7시에야 박정희 실장은 육본에 도착했다.

구미역에서 화물열차를 얻어 타고 상경했다는데

그 시간 이후론 보지 못했다.

 박 실장의 소재는 나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후퇴하면서도 정보국 동료들과 “우리 내기를 하자”고 할 정도였다.

박정희 실장은 남으로 갈 것인가, 북으로 갈 것인가.

수원으로 내려갈 것인가, 서울에 남을 것인가.

박 실장이 돌아와 인민군과 싸우게 되면 좌익 의혹은 사라질 것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조국을 배반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동료 두어 명은 “박정희는 의심스럽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후퇴하지 않았을 거다”고 주장했다.

나는 “박정희는 수원으로 갔다” 쪽에 걸었다.

우선 구미에서 걸려왔던 그의 전화를 믿었다.

그럼에도 100%의 확신은 아니었다.

 오후 5시 무렵 우리는 수원 농업시험장에 도착했다.

장병을 태운 지프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육군의 수뇌부 모습은 형편이 없었다.

미군 고문단이 이미 자리를 잡은 2층의 낮은 건물 한쪽에

육군본부를 차렸다. 우리 정보국은 인근 수원초등학교에 자리 잡았다.

내 눈길은 어느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 박정희 실장이 초등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34시간 만의 만남이었다.

옆에는 장도영 정보국장이 있었다.

“휴… 빨갱이가 아니었구먼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따뜻한 생각이 가슴속에 번졌다.

암담한 후퇴 상황에서 발견한 믿음과 환희였다.

박 실장은 “오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예의 그 멋쩍어하는 미소도 지어 보였다.

비로소 내 마음속의 큰 응어리가 풀렸다.

봄에 녹아 내리는 깊은 얼음 구덩이 같았다.

그에게 둘러씌워진 좌익 중죄(重罪) 이미지는 단단했다.

박 실장을 옥죄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집요했다.

 수원 육본에서 해후하면서 박 실장이 좌익이다,

아니다는 논란은 육본 정보국 내부에서는 사라졌다.

수원에서 박정희 실장은 1년여 전 벗었던 군복을 다시 걸친다.

장도영 당시 정보국장이 문관인 그의 현역 복귀 문제를 해결했다.

 전쟁 통이라 모든 것이 부족했다.

당시 우리는 철모의 내피인 파이버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의 복귀 결정 소식을 듣고서는 파이버 하나를 얼른 구해 왔다.

그 위에 그리스펜슬(종이말이 색연필)로 태극 무늬를 그렸다.

소령 계급장을 달리 구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파이버를 들고 가서 그에게 씌워 줬다.

그러자 박정희 소령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날 임명하는구먼.”


 지동도합(志同道合)이라는 말이 있다.

동지(同志)라는 한자 단어가 유래한 성어다.

품은 뜻과 가려는 길이 같은 경우를 말한다.

사상과 신념의 일치도 말해 준다.

5·16의 거사와 완성을 위한 멀고도 긴 여정에서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때 그렇게 뜻을 맞추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6·25 개전 초기 국군 혼란상

북한의 남침은 개전 뒤 사흘 동안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 개시 6시간 뒤인 6월 25일 오전 10시

경복궁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던 중 전쟁 발발 소식을 처음 접했다.

25일 오후 2시에 열린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북한의 공격은 공비 두목 이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해 벌인 책략으로

전면 남침은 아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한 대사 무초는 오전 10시26분 국무부에

“북한군이 전면 남침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이어 미 국무부는 대통령 주재 국가안보회의(NSC)를 거쳐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하는 등 긴급 대처에 나섰다.

주미 한국대사 장면의 요청을 받아들여 오후에는 도쿄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에 “한국에 탄약을 추가로 공급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유엔 안보리는 26일 오전 3시(한국시간)

‘적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튿날인 26일 국군은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옹진반도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공세를 이어갔다.

 27일에는 북한군이 의정부를 통과해 서울로 향했고

동부전선의 춘천과 강릉을 점령했다.

육군본부는 28일 오전 2시30분 한강 인도교를 끊기 직전

강을 넘어 수원의 농업시험장으로 옮겼다.

유광종 작가


● 인물 소사전 채병덕(1914~50년)=6·25 남침 당시 육군참모총장.

1950년 4월 취임 뒤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했다.

50년 7월 1일 육군참모총장직을 사임하고

영남 편성 관구사령관으로 물러났다.

그해 7월 27일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49기) 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육사 이전 장교 양성기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국군 군번 2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