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보고 즐길거리

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이야기.

핵무기 2012. 6. 16. 16:04

◈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이야기(10회)◈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
(KAIST 서양미술사 교수)



-캉팽 '메로드 제단화 중 수태고지' - 1425~1428년경,
목판에 유채, 64×63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클로이스터 분관 소장.


◆'빛'이 강림하면 촛불은 꺼지기 마련◆


평범해 보이는 집안 풍경이다. 
풍성한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독서에 몰두한 
나머지 대천사 가브리엘이 지금 막 큰 날개를 접으며 
방으로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다. 그녀는 성모(聖母) 
마리아다. 천사는 그녀가 곧 성령(聖靈)의 힘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임을 
알려주러 왔다. 흔히 '수태고지(受胎告知)'라고 하는 
이 장면은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 로베르 캉팽
(Robert Campin·1375~1444)이 그린 '메로드 제단화'의 
중앙 패널을 차지하고 있다. 패널 세 폭이 연결되어 여닫
을 수 있게 만들어진 이 제단화는 19세기에 마지막 소장
자였던 벨기에 귀족 메로드가(家)를 딴 이름이 붙었다.
중세 채색 필사본의 삽화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캉팽은 
창문에 박힌 못 하나하나와 흰 수건의 접힌 자국, 펼쳐진 
책의 글씨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 사물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평범해 보이는 이 모든 물건
은 실은 종교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테이블 위의 책과 
두루마리는 각각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다. 하얀 백합,
벽에 걸린 흰 수건과 물주전자는 모두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한다.
잉태의 기적은 이미 시작되었다. 왼쪽 벽의 동그란 창에서 
황금빛 광선과 함께 조그만 아기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성
모 마리아를 향해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테이
블 위의 양초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꺼져버린다. 세상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으로 내려왔으니 더 이상의 불
빛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
보는 듯한 정교한 묘사와 곳곳에 숨어있는 상징, 그리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영롱한 화면이 바로 이탈리아 미술의 
고전적인 미감과는 다른 북유럽 회화의 매력이다..
♣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 忠臣의 붉은 마음,
주름살과 사마귀에도 깃들었네 ◆


'이터널 선샤인' - 미셸 공드리 감독,
짐 캐리·케이트 윈슬렛 주연, 108분, 미국, 2004년

고려말의 충신(忠臣)으로 유명한 유학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 1392)의 초상이다. 누가 언제 그렸
는지는 그림 속에 쓰여 있다. 그린 해는 1880년, 그린 이는 
이한철(李漢喆)이다. 이한철은 조선 헌종·철종·고종 등 세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데 모두 참여한 화원(畵員)이다. 이 
그림은 개성의 숭양서원에 있던 정몽주 초상을 보고 베낀 
것이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다른 두 점의 정몽주 초상화
들도 베낀 그림이다. 생전의 포은을 그린 원본은 사라졌
고, 원본에서 본뜬 그림을 보고 다시 베낀 중모본
(重摹本)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베낀 
그림에서도 포은은 살아 숨 쉴까.
미술사가 최순우는 이 초상을 보면 존경심이 우러난다고 
했다. '양심과 용기의 아름다움'이 보여서 그렇단다. 고려
에 대한 포은의 충성을 은근히 염두에 둔 평가다. 이 작품 
어디에 포은의 단심(丹心)이 있을까. 이한철은 그림 윗부
분을 시원히 비운 채 아래에 반신(半身)을 앉혔다. 구도
에서 19세기 화가답게 세련된 감각을 살렸다. 차림새는 
모본(母本)에서 고스란히 따왔다. 사모(紗帽)에서 낮은 
턱과 아래로 처진 뿔, 그리고 단령(團領)에서 밭게 재단
된 목선 등이 여말(麗末)의 의관 그대로다. 허리의 꽃
무늬 금대(金帶)는 포은의 높은 지위를 알려준다.
그림 솜씨 좋은 이한철은 초상을 모사하면서도 버리고 
취할줄 알았다. 무엇을 살렸는가. 얼굴 주름을 엄청 강조
했다. 이마에 고랑이 파이고, 눈두덩은 자글자글하고, 볼
살은처지고, 턱은 겹겹이다. 공들여 그린 주름살 때문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이웃 영감처럼 낯익다. 하지만 놓
치지 말아야 할 곳은 따로 있다. 턱수염 위를 눈여겨
보자. 깨알만 한 점 하나, 바로 사마귀다. 14세기의
충신은 아득해도 사마귀가 있는 노인은 확 다가온다. 
포은의 체취가 정겹다. 이것이 초상의 오래가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