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보고 즐길거리

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이야기

핵무기 2012. 7. 10. 08:28

◈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이야기(13회)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


(KAIST 서양미술사 교수)



-르동 '무한을 향해 떠오르는 이상한 풍선 같은 눈'…
1878년, 종이에 목탄과 분필, 42.2×33.3㎝,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진실을 찾아 메마른 땅 위를 방황하노라◆


  미화(美貨) 1달러짜리 지폐의 뒤쪽에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눈 하나가 붙어있는 문양이 있다. 세상 만물을 
꿰뚫어보는 절대자의 눈을 상징하는 이 '섭리(攝理)의 눈
(Eye of Providence)'은 고대 문명으로부터 전해오는 진
리의 상징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상징주의 미술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의 어두운 그림 
속에서 이 눈은 이미 진리를 알고 있는 천상(天上)의 신
(神)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 메마른 땅 위를 방황하는 
우울한 인간의 눈이다. 눈구멍에서 빠져나와 속눈썹만 
남기고 꺼풀을 벗은 채 연약하기 그지없는 각막을 다 
드러낸 동그란 눈알이 허공을 바라보며 정처 없이 
떠다닌다. 눈물을 머금은 듯 촉촉한 그 모습이 
징그러우면서도 어딘가 안쓰럽고 애달프다.
  주로 목탄과 석판화를 이용해서 검은 색조로 마치 
악몽에나 나올법한 기괴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르동은 
이 그림을 미국의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에게 
바쳤다. 포는 '검은 고양이' '어셔가의 몰락' '갈까마귀' 
등의 작품을 통해 엽기적 살인, 광기 어린 복수, 분열된 
자아가 얽힌 공포스럽고도 침울한 상상력의 세계를 선
보였다. 사실 포의 실제 삶은 그의 소설보다 더 잔인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평생을 빈곤과 우울, 마약과 음주벽
에 시달렸고, 유일한 안식처였던 부인마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고통받다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포는 
그 5년 후, 마흔이 되던 해에 길거리에서 의식불명
으로 쓰러진 채 발견된 후 병원으로 
실려가 외롭게 죽었다.
  르동은 포의 작품을 그대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생(生)의 의미를 찾아 홀로 분투하는 쓸쓸한 눈은 
살아생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저주받은 천재' 
포에게 르동이 바치는 상징적

♣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이미 俗世 등져 머리 깎았거늘…
왜 시름 담아 두 눈 부릅떴나 ◆



'김시습 초상' - 작자 미상,
비단에 채색, 71.8×48.1㎝, 조선 중기, 부여 무량사 소장
    패랭이처럼 꼭대기가 둥근 갓을 쓴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챙이 있어 햇빛을 가리고, 눌러쓰면 세상을 피하기에 좋다는 그 갓이다. 크고 작은 호박 구 슬로 장식한 갓끈이 유난히 까맣다. 조선 초기의 학자 이자 문인이었던 김시습은 야인(野人)의 복장인 도포를 걸쳤다.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그가 지금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눈동자는 또렷한데 흰자위가 차갑다. '백안시(白眼視)'는 바로 저런 시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앞에 상대가 있다면 쌀쌀맞은 눈길에 오금이 저리겠다. 그리 봐서일까, 콧수염과 턱수염 도 단정하기보다 뻣뻣한 기운이 드세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읽던 책을 불사르고 출가했다. 그는 중이 되고자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수염은 남겨두었다. 누가 의아해서 물었다. 그는 대꾸하기를, "머리를 깎아 속세를 피하고, 수염을 남겨 장부(丈夫)임을 알린다"고 했다. 그의 생애는 그 말 그대로다. 머리는 중이요, 수염은 장부여서 승(僧)과 속(俗)을 오갔다. 그가 겪은 풍상이 오랜 초상화에 남았다. 조선 중기에 그려진 초상이라 세월을 지나며 비단 바닥에 금이 가고 군데군데 긁히 고 깎였다.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숨을 거둔 부여 무량사에서 내려온 이 초상은 그것과는 다른 이름 모를 화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김시습의 얼굴은 은은한 살굿빛이다. 필획과 채색이 희미해졌지만, 잘 들여다보면 눈썹 사이에 잔뜩 찌푸린 주름이 보인다. '내 천(川)' 자가 새겨진 골이 자못 깊다.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했을까. 그의 별명이 '김오세(金 五歲)'였다. 다섯 살짜리 신동이란 얘기다. 그의 재주 는 한 시절 임금을 기쁘게 했지만, 나라 돌아가는 꼴에 이내 염증을 낸 그는 구름처럼 떠돌았다. 찡그린 미간 과 희번덕하는 눈매를 보라. 시속(時俗)에 무젖지 않 으려는 고집이 안색에 고스란하다.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도자기의 역사-◈


  지난 6월 29일자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
에는 도자기의 역사를 거의 2만년 전으로 밀어올리는 
논문이 실렸다. 하버드대 인류학과의 바요세프(Ofer 
Bar-Yosef)교수가 이끄는 미국 연구진과 중국 베이징
대 연구진은 중국 지앙시 시안렌동 동굴에서 발견한 
도자기 조각들이 지금으로부터 1만9000~2만년 전
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종전의 도자기 발견 연대를 적어도 
2000~3000년 앞당긴 결과이다.
  고고학자들은 그동안 우리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면서 
도자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설명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최초의 도자기는 지금의 이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약 9000년 전 진흙으로 빚은 다음 햇볕
에 말려 단단하게 만들어 사용한 토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 뜻밖에도 일본에서 기원전 
1만5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즐문토기가 
발견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사하라사막 이남에 
살던 아프리카 사람들도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발견들로 인해 농경과 도자기의 관계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토기를 사용하던 일본과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 농경이 아니라 수렵채집 생활
을 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이언스 논문은 
도자기의 사용과 수렵채집 생활의 관계를 더욱 공고하
게 해주었다.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해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때보다 무려 1만년 전에 만들어진 
도자기임이 밝혀진 것이다.
  바요세프 교수와 하버드대 인류학과에 함께 있다가 
몇 년 전 '인간진화생물학과'라는 신설 학과를 만들어 
독립한 영장류학자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은 
그의 근저 '요리 본능'에서 단순히 불의 소유가 아니라 
불을 이용한 요리의 발명이 우리를 진정한 만물의 영장
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불의 발견이 요리
에 필수적이었지만 도자기의 발명이 수반되지 않았다
면 우리의 요리는 기껏해야 꼬치구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도자기가 그저 식량을 보관하는 데 그 
게 아니라 요리를 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확실한 증거
가 발견되었다. 이번에 발견된 몇몇 도자기 조각들
에는 불에 그슬린 흔적이 역력했다고 한다. 빙하기 
사람들도 아마 곰국을 즐겨 먹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