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예화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

핵무기 2012. 7. 18. 07:31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


-시인, 류시화-

      
 1 
달 표면 오른쪽으로 거미가 기어간다 
월식의 흰 이마 쪽으로 
어느 날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밤늦은 시각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흰 빗금을 그으며 
산목련이 떨어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거미가 달의 뒷면으로 사라지기 전이었을 것이다 
텅 비고 깊고 버려진 목소리 
망각의 정원에 핀 환영의 꽃 같고 
육체를 이탈한 새의 영혼 같고 
얼마큼의 광기 같은 
당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전화는 연결 상태가 좋지 않다 
당신 아직도 거기 있어요? 
당신도 아직 거기 있어요? 
      
2 
지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매화는 피었나요 소복이 
삼월의 마지막 눈도 내렸나요 지난번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물었나요 
그 꽃가지 꺽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답기로 
그 꽃은 
눈꽃이니까 
천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그곳에도 매화가 피었나요 촉촉이 
초봄의 매우도 내렸나요 혹시 
육체를 잃어서 슬픈가요 
그 꽃가지 꺽지 말아요 
아무리 신비하기로 그 꽃은 
환생의 꽃이니 

3 
어느 날 너는 경계선 밖에서 전화를 걸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幻속에서 
이미 재가 되어 버린 손가락으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네가 있는 여기 
봄 그리고 끝없이 얼굴을 바꾸며 
너화 함께 이동해 준 여러 번의 계절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기억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만큼 살지 않았을 뿐 
어느 날 갑자기 너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질문과 회피로 일관하던 삶을 떠나 
이미 떨어진 산목련 꽃잎들 위에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지듯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들에 
또 하나의 생을 보태며         

*바르도-'둘 사이'라는 뜻의 티베트 어로, 
         사람이 죽어 일정 기간 머무는 곳 
*매우(梅雨)-매화 질 때 내리는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