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 德 旅 館
忠淸南道 禮山郡 德山面 斜川里 17-1番地
주인 없는 빈집으로 방치된 지 5년여 만에 修德旅館이 새 주인으로 맞았다. 修德寺 주지 법정은 2006년 1월 16일 李應魯 화백의 손자 李鍾晉씨로부터 修德旅館을 증여받는 절차를 마무리했다.
修德寺 一柱門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金一葉스님과 羅蕙錫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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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葉스님(金一葉, 본명 金元周, 1896-1971)은 韓國 開化期에 女性 文學家이며 新女性의 상징으로 숱한 逸話를 남기면서 세 번의 사랑을 하면서 아들 金泰伸(日堂스님, 金一葉과 日本 名門家 아들 오타 세이조(太田淸藏) 사이에 난 私生兒) 하나를 낳았고, 두 번의 결혼을 하였으나 두 번 모두 이혼하는 등 스님 자서전의 타이틀처럼 '청춘을 불사르고'가 1933년 이 곳 修德寺의 滿空스님 門下로 들어와 출가를 하고 수도승으로 용맹정진을 했다. 一葉스님은 1971년 세수76세, 법랍 38년으로 열반을 한다.
開化期의 화가 羅蕙錫(1896-1948)은 一葉스님과 함께 그 時代를 대표하는 新女性으로, 日本 유학에서 만나 귀국해서도 같이 활동을 했다. 화려한 삶을 살며 두 번의 사랑을 하여 사별과 버림을 받았고, 한 번 결혼하지만 외간남자 (崔麟, 1878-1958, 독립선언 33인 중의 한사람, 후에 친일파로 변신)와의 파리에서의 부정행위로 이혼을 당하고, 결국에는 자식을 시댁에 남겨두고 빈몸으로 쫓겨난 이혼녀 신세가 되어 삶의 의욕을 잃고 출가를 하고자 일엽이 있는 修德寺로 왔다.
羅蕙錫의 逸話가 있다. 修德旅館에 있을 때 一葉스님이 日本에서 낳은 아들(金泰伸, 당시 14세)이 어머니를 만나러 修德寺로 찾아왔지만 一葉스님은 아들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고 부르라며 냉정하게 대하였다. 세 아이를 시댁에 남기고 온 羅蕙錫은 모정에 굶주린 金泰伸이 안스러워 잠자리에 들 때 팔베게를 해주어 잠을 재워 주었고, 이후에도 金泰伸이 찾아 올 때 마다 그렇게 해 주었는데 羅蕙錫이 이렇게 정이 많은 것을 알고 滿空스님이 그미의 출가를 거절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견해도 있다.
그림을 그리는 羅蕙錫은 金泰伸에게도 영향을 주고, 羅蕙錫을 선배화가로서 누님처럼 따르면 자주 修德旅館으로 찾아 오던 李應魯도 金泰伸에게 영향을 주어 후일 스님으로 출가한 金泰伸도 그림에는 나름 경지에 들었다고 한다. 金泰伸 日堂스님은 直指寺의 中庵 庵子에 있다고 한다.
 金一葉스님, 아들 金泰伸 日堂스님, 羅蕙錫, 李應魯 (左에서 右)
海岡 金奎鎭 門下에서 깊은 열정으로 서양화 공부를 하던 李應魯에게 프랑스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이름난 羅蕙錫은 선배이자 스승으로 좋아하며 羅蕙錫을 만나러 修德旅館에 자주 오게 되고 나중에는 李應魯도 羅蕙錫이 있는 修德旅館에서 머물게 되었다.
1944년 羅蕙錫은 출가를 포기하고 修德旅館을 떠나자, 李應魯는 修德旅館을 사들여 부인 朴貴嬉 여사에게 운영을 맡기고, 韓國戰爭 때는 이곳에서 피란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李應魯는 梨花女大에서 미술강의를 하게 되는데 그때 제자인 21세 연하인 朴仁京과 눈이 맞아 연애를 하게 되고 1958년 李應魯는 그 제자와 함께 그림공부를 한다며 파리로 떠났다. 제자와 눈이 맞아 남편이 떠난 후 소박데기가 되어 버린 朴貴嬉는 묵묵히 修德旅館을 꾸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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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東白林事件에 연루되어 李應魯가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잡혀오게 되고, 大田교도소, 全州교도소 등에서 옥살이를 하는데 朴貴嬉는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李應魯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렇게 1여년을 옥살이하고 풀려난 李應魯는 修德旅館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며 여관 앞마당에 있는 바위에 암각화를 새기며 시간을 보내다가 解禁이 되어 旅卷을 다시 받자 李應魯는朴貴嬉에게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고 1969년 곧바로 파리에 있는 朴仁京에게로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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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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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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