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보고 즐길거리

우정아의 아트스트리

핵무기 2012. 9. 26. 10:56

◈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이야기(23회)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
(KAIST 서양미술사 교수)



- 슝크·켄더‘허공으로의 도약’
-1960년. 젤라틴 실버 프린트, 25.9×2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나는 뛰어내린다, 육체의 '탈옥'을 위해 ◆

 프랑스 파리의 평범한 골목길. 
건물 2층에서 양복 차림의 한 남자가 
뛰어내린다. 충격적인 이 사진의 주인공은 
1950년대의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이브 클랭(Yves Klein·1928~1962)이다. 물론 그
가 실제로 2층에서 뛰어내린 건 아니다. 사진작
가인 해리 슝크(Harry Shunk·1924~2006)와 
자노스 켄더(Janos Kender·1937~1983)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연
기한 클랭과 골목길 사진을 따로 찍어 오
려붙이고, 그 사진을 재촬영하여 마치 
진짜 같은 합성 사진을 만들어냈다.
 온몸에 파란 물감칠을 한 누드 모델들이 
캔버스 위에 엎드려 몸을 끌고 다니게 하는 
것으로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등 파
격적인 작업 방식을 고수했던 클랭에게 '허공'
이란 '문화'의 이름으로 억눌렀던 육체적 감각을 
되찾을 수 있는 해탈의 공간이었다. '허공으로의 
도약'은 이처럼 자유분방한 실험정신을 추구했
던 20세기 전위미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진을 찍었던 슝크와 켄더는 동성(同性) 
연인이자 동업자였다. 그러나 1970년 두 사람의 
결별 이후 슝크는 외부와 단절한 채 자신의 뉴욕 
아파트에서 두문불출하다 2006년 사망한 지 열흘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슝크의 아파트는 온갖 쓰레기
로 가득 차 문을 열 수도 없었는데, 그 속에서 이브 
클랭은 물론 앤디 워홀과 크리스토 등 유명 미술가
들의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버려진 슝크의 '쓰레기
'를 별생각 없이 보관했던 아파트 청소부는 그 안에
서 건진 미술품 덕에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슝크는 
그 물건들 속에 거꾸로 처박혀 발목만 내놓은 채 
죽어있었다고 한다. 연인이 떠난 빈자리를 물건
으로 채워보려다 결국 채워지지 않는 마지막 
빈자리, 그 '허공'으로 몸을 던졌던 걸까.


♣ 손주철의 옛 그림 옛사람 ♣

◆ 이 그림이 스님 초상화라고?…
꼭 얼굴을 보아야만 보았다고 하겠는가 ◆


- '환월당 진영'
- 작자 미 상 , 비단에 채 색, 120.7×70.7㎝, 1881년,
선암사 성보박물관 소장. . -

 이 그림은 초상화다. 
아니, 얼굴이 안 나오는 초상(肖像)도 있는가. 
의아한 사람은 화면 가운데를 보면 고개를 끄덕일 
테다. 사각형 테두리 모양은 위패(位牌)인데, '환
월당대종사진(幻月堂大宗師眞)'이라고 적혀 있다. 
풀이하면 '환월당이라는 법호(法號)를 가진 큰
스님의 진영(眞影)'이다. 절집에서는 초상을 
흔히 '진영'이라 칭한다. 화가는 얼굴 대신 
이름만 가지고 초상화를 그린 셈이다.
큰스님이 무슨 면목(面目)이 없어서 그랬을까. 
물론 아니다. 모든 상(相)이 다 허깨비라서 상
(像)을 그리지 않았다. 마침 스님의 법호에도 
'허깨비[幻] 같은 달[月]'이 들어 있다.
환월당(1819~1881)은 법명이 '시헌(時憲)'이다. 
그는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나 선암사로 출가했다. 
3년 동안 문 닫아걸고 법화경만 파고들어 마침내 
달통했다는 학승(學僧)이다. 모르는 게 없어 그의 
설법은 명료했고, 따르는 후학이 늘 
도량에 넘쳐났다.
숨은 그림 찾듯이 배경을 요모조모 뜯어보자. 
거기에 환월당의 구도(求道)가 들어 있다. 등용
문을 상징하는 잉어 두 마리가 물살을 박차고, 
신성한 사슴이 상서로운 영지를 입에 물었다. 
오른쪽 필통에 붓과 두루마리가 잔뜩 꽂혀 
있는데, 왼쪽 서안 위에는 첩첩이 쌓아올린 
법화경이 보인다. 그의 학구적인 이력이 
민화풍의 장식과 아귀가 착착 들어맞는다.
그림 왼쪽 맨 위에 환월당을 기리는 글이 있다. 
그의 제자인 원기(元奇)가 지었다. 법호에 나오
는 '환(幻)' 자를 운율 삼아 쓴 내용이 웅숭깊다. 
'헛된 몸으로, 헛된 세계에 나타나, 헛된 설법으
로, 헛된 중생을 제도했도다.' 헛되고 헛되다니, 
무례하게도 제자가 스승을 욕보이자는 뜻인가. 
천만에, 산(山)은 산이면서 산이 아니기도 
한것이 선가(禪家)의 어법 아니던가. 
헛됨으로 참됨을 가르칠 요량이다.
이 그림은 묻는다. 
'스님의 모습을 꼭 봐야만 스님을 알겠는가.' 
보아야 아는 자는 보여줘도 모른다.


♣ 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


◆성폭력,편견의 이중고...
그녀는 싸웠고, 이겨냈다 ◆


-'피고인'… 조너선 캐플란 감독,
조디 포스터·켈리 맥길리스 주연,
111분, 미국·캐나다, 1988년. -

 1983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의 한 
술집에서 집단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술집 
당구대에 여자를 묶어놓고 여러 사내가 강간한 
것이었다. 그동안 다른 손님들은 구경꾼이 되어 
그 장면을 '관전'했다. 이 끔찍한 사건은 미국 사
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화가 수 코우는 '베드퍼드 
강간 사건'이라는 그림을 남겼고, 조너선 캐플란 
감독은 영화로 만들었다. 여주인공 조디 포스터
에게 첫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준 
'피고인(The Accused)'이다.
 '피고인'은 중의(重義)적인 단어로 볼 수 있다. 
법정의 피고석에앉은 것은 물론 몹쓸 짓을 저지
른 범인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기소된 죄목은 성
폭력 범죄가 아니라 단순 폭행 혐의다. 피해자인 
세라가 사건 당시 술에 취한 상태였으며 마리화
나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 등으로 검사가
 변호사와 합의한 결과다.
 피해자임이 분명한 세라에게 세상은 오히려 
섬뜩한 단죄(斷罪)의 시선을 보낸다. '섹시한 
옷차림으로 한밤중에 홀로 술집에 들어선 여
성 '이라는 이유로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여자, 
더 나아가 당해도 쌀 만큼 헤픈 여자라고 손
가락질하는 것이다. 남성 위주의 견고한 사
회 통념 속에서 이중 고통에 놓인 사라는 
분연히 일어나 기나긴 법정 투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너무도 억울해서일 
것이다.
 쉽지 않은 투쟁 과정은 인물들의 인생을 변화
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밑바닥 삶을 살던 범
죄 피해자에서 자기 주체성을 자각하는 여성이 
되어가는 사라, 진실과 정의를 위해 진심으로 
행동하게 되는 검사 캐서린(켈리 맥길리스)이 
그렇다. 그리고 또 한 명, 실화(實話)에는 없
던 이가 영화에 등장한다. 사건 당시 얼떨결
에 구경꾼 노릇을 했지만 두고두고 가책을 
느껴온 대학생 케네스 조이스(버니 쿨슨)다. 
친한 친구를 불리하게 만들 수 없어 오래 망
설이다가 그는 결국 법정에 선다. 그러곤 진
실을 밝히는 결정적인 증언을 토해낸다. 
양심의 작은 속삭임을 저버리지 못한 자
의 뒤늦은 속죄(贖罪)다. 늦더라도 움직
일 때만 세상은 조금씩 나아져간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인물이다.
♣ 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


◆"이젠 인생이 근사하게 바뀔 리 없잖아"
중년 회사원의 도피처는 '정직한 세계' ◆


-'쉘 위 댄스'… 스오 마사유키 감독,
야쿠쇼 고지·구사카리 다미요·다케나카 나오토 주연,
136분, 일본, 1996년.-

 때론 아저씨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일본 영화 '쉘 위 댄스(Shall We ダンス?)'의 
스기야마 부장(야쿠쇼 고지)은 사는 게 재미없는 
남자다. 멀쩡한 가족도, 직장도 있다. 아직은 배도 
안 나오고 이마도 벗겨지지 않았다. 사회에서 도태
되지 않은 중년 남성이라면 이 정도쯤 갖춰야 한다
고 간주되는 여러 가치를 두루 지닌 이 남자는 왜 
원인 모를 무력증에 시달리고 있는가? 삶의 방향
은 진즉 확고부동해졌다. 이젠 더 이상 인생이 
근사하게 바뀔 리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그는 
공허하고, 조심스레 일탈을 꿈꾼다.
스기야마가 선택한 일탈은 춤, 사교댄스다. 
'춤바람'이라고 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통속극 
대본 같은 사연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 남자가 흠
뻑 빠진 것은 춤 그 자체의 매력이다. 춤은 몸을 
사용하는 예술이다. 공평하고 정직하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걸음마부터 새로 
배워야 하며, 앞 단계를 제대로 통과해야만 
그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딱 내가 연
습한 만큼 실력이 늘고 구슬땀을 흘린 
만큼 정직한 보상으로 되돌아오는 
세계가 흔한 것은 아니다.
사교댄스가 조직적이고 엄격한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스포츠라는 사실도 한몫한다. 
스기야마가 사는 '진짜' 세계는 정해진 규율
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곳이다. 이 중년 사내는 편법
과 꼼수·계략이 판치는 현실의 룰로부터 도
망쳐 절제와 존중이 미덕인 안전한 '춤판'
으로 숨어들었다. 혼자만의 방(房)을 향한 
이 신사적인 도피 행각은 어떤 것도 파괴
하지 않고서 어쨌거나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일본의 '쉘 위 댄스'와 같이 자주 거론되
는 한국 영화가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이다. 
평범한 회사원(송강호)이 밤이면 가면을 쓰고 
레슬러로 변신하는 이야기다. 사교댄스로 도
망치는 남자와 프로레슬링으로 도망치는 남
자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심히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