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보고 즐길거리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핵무기 2012. 10. 3. 08:21

◈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이야기(25회)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
(포스텍 서양미술사 교수)



-밀레 '손수레를 미는 농부'
- 1848~1852년, 캔버스에 유채, 45×38㎝,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 평온한 농촌, 건실한 농부의 모습…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향수였다 ◆

  한 농부가 곡식을 가득 얹은 손수레를 밀고 
있다. 추수를 기다리는 들판만큼이나 따스한 느
낌의 황금빛 햇살이 온 화면에 스며들었다. 돌담
이며 농기구, 담장 위로 수북하게 피어난 꽃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결코 초라하거나 궁핍한 기색이 없는 평온한 
농촌 풍경이다. 이는 흔히 '농부 화가'로 잘 
알려진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1875)의 작품이다.
 눈길을 잡아끄는 새파란 바지를 입고 
외바퀴 수레를 능숙하게 다루는 농부의 
뒷모습은 여유로우면서도 굳건하다. 밀레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농부가 그렇듯이,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밀레는 한 사람의 
개성적인 초상화가 아니라 노동, 그중에서도 땅
을 일구는 농사일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던 것이
다. 그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오직 온몸을 
움직여 힘들게 일한 만큼만 가져가는 정직하
고 성실한 노동의 고귀한 가치를 이처럼 이
상적인 농부의 상(像)을 통해 표현했다. 
 그러나 밀레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의 
프랑스에서는 이미 산업화와 기계화의 물결이 
농촌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도 대규모 자본으로 기계와 저임금 인부들
을 동원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사업가들의 각축
장이 된 것이다. 밀레의 그림이 각광을 받았던 
것은 그 속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존재, 즉 
평온한 농촌과 건실한 농부에 대한 
향수의 소산이었다.
 밀레의 그림은 산업화와 도시화에 온 국민이 
전력을 다하던 1960~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국민 대부분이 농부의 
자식이던 시기였다. 쌀은 논이 아니라 마트에서 
난다고 믿는 요즘 아이들 눈에는 밀레의 
그림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 


♣ 손철주(미술평론가)의 옛 그림 옛사람 ♣

◆ 고주망태 酒暴들은 늘 골칫거리였다 ◆

- 김후신 '대쾌도'
- 종이에 담채, 33.7×28.2㎝,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때는 가을, 
나무 잎사귀에 단풍이 슬슬 물들어간다. 
무대는 숲길,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개울이 
졸졸 흐른다. 그런데 느닷없이 왁자한 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이 무슨 난장판인가. 고주망태가 
된 술꾼들이 서로 뒤엉켜 엎어지고 자빠지고 수
선스럽기 짝이 없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말이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차림새는 버젓한 반촌(班村) 
사람들인데 행실은 도무지 꼴불견이다. 뭣들 
하는 꼬락서니인지 하나하나 뜯어보자.
 가장 골칫덩이는 가운데 사람이다. 
망건 위로 상투가 아예 수세미가 된 작자다. 
그는 벌써 정신 줄을 놓았다. 갓은 어디서 벗겨
졌는지 없고, 대자(大字)로 쓰러지며 고래 고함을 
지른다. 술 취한 패거리가 해대는 수작은 예나 지
금이나 똑같다. 그 때문에 낭패를 보는 쪽은 덜 
취한 이들이다. 앞사람이 손목을 잡아끌지만 
해롱대는 놈은 누구도 못 당한다. 곁에서 겨
드랑이를 부축해도 악다구니 쓰며 버티면 
도리가 없다. 뒷사람은 온 힘을 다해 등을 
받쳐주다가 제풀에 고꾸라질 판이다. 가을
의 적막을 깨는 취객(醉客)의 소란에 나무
들이 다 놀랐다. 줄기에 크게 파인 자국이 
마치 휘둥그런 눈처럼, 딱 벌어진 
입처럼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조선 영·정조 때의 
화가 김후신(金厚臣)이다. 그는 술 마신 뒤끝이 
볼썽사나운 양반들을 풍자했다. 제목은 '대쾌도
(大快圖)'라고 했지만 남이 보면 불쾌(不快)한 
장면이다. 김후신이 활동했던 영조 시절은 금
주령이 엄혹했다. 벼슬아치가 술 취했다는 이
유 하나로 임금이 그의 목을 베어버리기도 
했다. 몰래 술 마시다 들켜서 귀양살이 떠
난 이도 속출했다. 요즘 주폭(酒暴)이 
들으면 오금이 저리겠다.
 상쾌한 주도(酒道)는 정녕 찾기 어려운 것인가. 
중국 송나라의 학자 소옹(邵雍)이 읊은 시에 귀를 
기울여 보자. '좋은 술 마시고 은근히 취한 뒤(美
酒飮敎微醉後)/ 예쁜 꽃 보노라, 반쯤만 피었을 
때(好花看到半開時).' 이 좋은 양생법(養生法)
을, 술꾼들이여, 어찌 그리 모르시는가.


♣ 허동현(경희대 역사학자)의 모던 타임스 ♣


◆ 추석 귀성…
속도전에 지친 사람들의 숨고르기였다 ◆


- 1970년 한가위, 서울역 -
1970년 9월 14일 추석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 광장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귀성객들의 모습.

 전통시대 추석(秋夕)은 죽은 이와 산 자, 
그리고 마을공동체가 가을걷이의 풍요를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이었다. 추석날 아침이면 일가
붙이가 모두 모여 햅쌀밥과 송편, 햇과일로 차례
를 올린 후 조상의 묘소를 찾았다. 벌초를 끝내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풍년을 기원하는 소놀이와 씨
름판을 벌였고, 밤이면 부녀자들은 둥근 달을 바
라보며 강강술래를 돌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
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 조선시대 한양의 연중
(年中) 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
1819)'에 담긴 민초(民草)들의 바람마냥 온갖 
열매와 곡식이 무르익는 추석은 고픈 배를 
움켜쥐고 보릿고개를 넘던 시대에 
설날보다 소중한 명절이었다.
 '시간의 문명화'가 단행된 근대 이후 
태양력이 사람들의 일상을 규율하기 시
작했지만, 음력 8월 15일 추석은 일제나 
광복 후에도 국가권력이 좌지우지할 수 없
었다. 6·25전쟁과 산업화에 따른 인구의 도
시집중이 본격화된 1960~80년대 추석 연휴 
기간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은 귀성인파로 인
산인해를 이루었다. 청운의 꿈을 좇아, 일자
리를 찾아, 좀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잡기 위해 
도시로 밀려들었던 사람들은 두 손가득 선물 
보따리를 챙겨들고 고향을 찾았다. '멈춤 없는 
전진'이란 구호가 울려 퍼지고, 공장 굴뚝의 연
기와 불 밝힌 사무실이 발전의 상징이던 그 시
절에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와 같은 기차와 버스
를 마다 않고 추석이면 고향을 찾은 것은 일터
의 생존경쟁에 지친 몸과 마음의 피로와 도시
의 익명성이 초래한 고독을 달래 줄 가족과 
이웃의 따스함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떠나 온 근원(根源)으로의 회
귀(回歸)인 귀성(歸省)을 통해 시간과의 
속도전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가쁜 
숨을 골랐다.
 1990년대 핵가족 시대의 도래와 함께 민속 
명절인 추석의 의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농
촌의 부모들이 도시의 자녀를 찾는 '역(逆)귀성'
이란 신조어가 등장하고, 조상 묘의 관리와 차례 
상차림을 생면부지의 남에게 맡기는 '벌초 대행'
과 '제사상 대행' 업체가 성업 중이다.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도 절반이 휴양지를 향하며
공항은 해외로 떠나는 관광객으로 붐빈다. 마을공
동체는 물론 가족마저 해체된 개인의 시대를 사
는 우리는 해가 갈수록 돌아갈 고향과 품어 줄 
가족의 품이 그리운 존재가 되고 말 것 
같아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