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보고 즐길거리

사랑에 빠진 여인.

핵무기 2012. 11. 7. 09:16

◈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이야기(30회)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
(포스텍 서양미술사 교수)



- 레오나르도 다빈치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1489~1490년, 목판에 유채, 54×39㎝,
폴란드 크라쿠프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소장. -


◆ 사랑에 빠진 이 여인,
곧 닥칠 운명도 모른 채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
1519)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모나리자'를 
그렸지만, 그의 본업은 사실 화가가 아니었다. 예술과 
공학,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세상 만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그림 
이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당시 밀라노를 다스리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 아래서 군사 기술자로 일했다.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은 루도비코의 주문으로 그린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초상화다. 체칠리아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라틴어에 능통하고 음악과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고, 루도비코
는 그런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섬세한 입술과 선이 고운 얼굴을 가진 그녀는 
화면의 왼쪽을 향해 앉아 있다가,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그림 밖에 존재하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화면 오른쪽에 조명을 
두고 그녀의 얼굴을 비춘 후, 목을 따라 어깨를 향해 흐
르는 부드러운 갈색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처럼 미묘한 
명암의 변화를 통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우아
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녀의 동공 속에서 밝은 빛이 
피어오른다. 사랑에 빠진, 그리고 사랑을 받는 사람의 
눈빛이다. 그림 밖에서 그녀를 부른 건 
물론 루도비코였을 것이다.
  체칠리아가 안고 있는 흰 담비는 바로 루도비코의 
문장(紋章)이자, 임신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1491년, 그의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루도
비코는 경쟁국 페라라의 유력한 귀족인 데스테 집안
의 딸과 결혼했다. 그들의 성대한 결혼식을 기획했던 
것도 레오나르도다. 품에서 담비를 빼앗긴 체칠리아
의 모습을 상상하면 측은하기 짝이 없다.

♣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
(경희대학 역사학 교수)


◆ 김장철 무·배추 실은 트럭은
通禁도 '열외'였다 ◆

- '김장의 전성시대'
1960년대 김장 시장 모습.
1970년대만 해도 채소 재배 면적에서 30%를 점하던
배추는 2000년대 들어 10% 이하로 줄어들었다. -


문화전통에도 시대성이 있다. 
우리 식(食)문화를 대표하는 매콤한 김치도 아무리 
올려잡아야 300년이 채 못 된 그리 오래지 않은 먹거
리다. 17세기에 전래된 고추를 넣어 담근 최초의 김치
는 배추김치가 아니라 네모지게 썬 무에 고춧가루 국
물을 부어 익힌 나박김치였다. 세로로 쭉쭉 찢어 밥 
위에 얹어 먹는 배추김치가 밥상머리에 오른 것은 
겹겹의 고갱이가 빼곡히 들어찬 결구(結球)배추가 
나온 18세기 이후였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깨끗이 씻어 소금 간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 
/ 양지에 가가(假家) 짓고 볏짚에 싸 깊이 묻소." 
조선 헌종(憲宗) 임금 때인 1843년에 실학자 정약용
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 겨우내 먹을 김치를 한 번에 
담는 김장이 우리 풍속으로 굳어진 것은 다시 한 
세기가 더 흐른 19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인간의 어머니인 대지에서 유리(流離)된 부평초 
같은 삶을 사는 도시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
작한 1950년대 이후, '비교적 값싼 김장, 그래도 담근 
가정은 4할 미만'이라는 1952년 11월 25일자 조선일보
의 기사 제목이 대변하듯,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입
동(立冬) 즈음이면 도시의 서민들은 겨우살이 준비에 
속을 끓였다. 굶길 밥 먹듯 하던 그때 밥상의 마지노
선을 지킬 김장 걱정에 월급봉투가 얇은 가장들은 
고개를 숙였고 주부들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또 
하나 늘어났다. 아파트 입주자들이 김칫독을 
어디에 묻어야 할지 고민하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김장철이면 무와 배추를 실어나르는 화물
차는 서슬 퍼런 통금도 예외였을 만큼 김장은 
중요한 한 해 행사였다.
  그러나 산업화의 성공과 함께 우리 밥상에 
깃들기 시작한 풍요는 쌀 소비만 줄인 것이 아니다. 
식생활의 서구화, 김치전용 냉장고의 등장, 엄동설
한에도 푸성귀를 흔하디흔하게 만든 재배기술의 
발달, 그리고 김치산업의 발달로 접(100포기) 단
위로 담그던 김장 배추김치가 10포기 남짓으로 
줄어든 오늘이다. 땅속 깊이 묻은 독 안에서 
제 대로 익은 배추김치와 살얼음이 살짝 
언 동치미의 옛 맛이 그립다.


♣ 정이현의 히어로 & 히로인 ♣
(소설가)


◆ 아무리 나이 먹어도 늘 새로운 말,
'사랑' ◆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제임스 L 브룩스 감독, 잭 니콜슨·헬렌 헌트 주연,
139분, 미국, 1997년.

  계절은 종종 나이에 비유되곤 한다. 
깊은 가을은 사람 나이로 치면 몇 살일까? 
50대쯤이 아닐까 싶다. 젊은 시절에 비해 외모야 
많이 변했겠지만 감정은 늙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매력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중
년 남녀도 얼마든지 서로에게 설렐 수 있고, 
사랑에 빠질 수 있고, 누구보다 절실하게 
서로를 원할 수도 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
의 주인공은 중년의 로맨스 소설 작가 멜빈 유달(잭 
니콜슨)이다. 그는 사랑을 글로 배운 남자다. 그가 
창조한 소설 속 주인공들은 낭만적이고 달콤한 밀
어(蜜語)를 속삭이지만, 정작 뒤에 숨은 작가는 매
사에 냉소적이고 괴팍한 대머리 아저씨이다. 또한 
그는 강박증 환자이기도 하다. 길을 걸을 때 보도
블록의 금을 밟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식당
에 가면 늘 같은 테이블에 앉지 않으면 불안하다. 
음식이 나오면 휴대용 나이프와 포크를 꺼내 드
는 등 결벽증도 유난하다. 이러니 주변에 사람
이 있을 리가 없다. 멜빈은 항상 혼자이고, 
혼자여도 상관없다며 점점 더 마음의 문을 
닫고, 그럴수록 고립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그런 멜빈에게 유일하게 친절히 대하는 사람이라곤 
단골 식당의 웨이트리스인 캐롤(헬렌 헌트)뿐이다. 
그녀가 유달리 착한 성품이어서라기보다는 먹고살
기 위해서다. 그녀에게는 남보다 성실히 일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천식을 앓고 있는 어린 아들
의 생계가 어깨 위에 무겁게 얹혀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팍팍한 일상을 살다 보니 여자로서의 
삶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멜빈이 캐롤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하는 
말이 "당신은 나를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만든다(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이다. 과연 사랑은 늙지 않는다. 중년 남녀에게도 
사랑은 희망에 찬 미래진행형인 것이다. 러브스토
리란 결국 두 어른의 성장담이라는 것을 11월에 
어울리는 이 영화가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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