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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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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텍 서양미술사 교수)
◆ 너른 들판 풍경 속, 자유와 풍요의 의미 담아 ◆ 야코프 판 라위스달(Jacob van Ruisdael· 1628~1682)은 네덜란드 하를렘의 유명한 풍경화가 집안 출신이다. 하를렘은 네덜란드 미술이 황금기를 구가하던 17세기에 무역과 제조업의 중심 도시로 번창했다. 라위스달의 풍경화는 하를렘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매일 보고 사는 익숙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야트막한 둔덕에서 내려다본 강과 붉은 지붕 집들, 거대한 성(聖) 바보 성당과 크고 작은 풍차들이 점점이 박힌 들판이 높은 하늘 아래 펼쳐져 있다. 대지의 습기 를 머금고 지평선에서부터 상공을 향해 솟아오른 뭉게 구름은 마치 그 무게가 느껴질 것처럼 육중하고 뚜렷 하게 그려졌다. 화가는 세로로 긴 캔버스의 3분의2 이상을 하늘로 채워 비교적 작은 그림에서도 광활한 공간감을 느끼게 했다. 16세기 초부터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인들은 1648년에 이르러 마침내 80년 간의 투쟁을 마치고 독립을 쟁취해 공화국을 세 웠다. 대부분 개신교도이기도 했던 그들은 기존 유럽의 전통과 전혀 다른 분야의 미술품을 낳았다. 그때까지 미술품의 수요자는 주로 성상(聖像)을 중시하는 가톨릭 교회나 정치 선전의 수단으로 문화를 활용했던 왕실 및 귀족이었다. 이와 달리 종교와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네덜란드인들은 라위스달의 풍경화처럼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을 원했다. 라위스달의 그림 속 너른 들판에는 흰 리넨천을 길게 널어 말리는 표백장(場)이 있다. 테이블보와 냅킨 등의 사치품에 활용되던 리넨천의 제조 및 표백은 하를렘 시민에게 부(富)를 가져다준 주요 업종이었다. 이 또한 그들에게는 낯익은 광경이 었겠지만 그 속에는 틀림없이 스스로 쟁취한 자유와 성실한 노동의 대가로 누리는 풍요에 대한 자부심이 서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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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 한선국 그림, 종이에 담채, 34.8×24.4㎝, 17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 요(堯)는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聖君)이다. 그 태평하던 시절에 허유(許由)는 숨어 살았다. 허유는 고결한 인물이었다. 요 임금은 그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기로 했다. 임금의 뜻을 전해 들은 허 유는 냅다 도리질했다. 그는 곧바로 강에 나가 귀를 씻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 귀가 더럽혀졌다는 것이었다. 이게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허유가 귀를 씻은 이야기'이다. 그림 왼쪽, 물가에 주저앉은 사람이 보인다. 그가 허유다. 한쪽 어깨를 드러낸 그는 손가락을 연신 귀에 갖다 댄다. 흐르는 물로 귀를 씻고 또 씻어낸다. 허유보다 더 매서운 은사(隱士)가 소부(巢父)다. 마침 소를 몰던 그가 자초지종을 들었다. 소부는 대 뜸 허유를 나무랐다. "제대로 숨었으면 사람이 찾아 왔겠는가. 명예가 세상에 알려지기를 은근히 기다린 건 아닌가." 소부는 소에게 물을 먹이려다 그냥 돌아 섰다. 더러운 말을 듣고 귀를 씻은 물은 또한 더러울 테니 소의 입까지 더럽히기는 싫다고 했다. 오른쪽, 소에 올라탄 사람이 소부다. 그는 소가 물을 먹지 못하게 고삐를 낚아채는 시늉을 한다. 소부가 얼마나 꼿꼿한지, 소 등에 서 있는데도 흐트러짐이 없다. 허유와 소부의 고사는 옛 그림의 소재가 되기에 좋았다. 권력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제 한 몸의 청결을 오로지하는 은사는 본보기가 된다. 이 그림도 한마디로 줄이면, 누가 더 깨끗한지 내기하는 모양새다. 조선 인조 때 화원(畵員)으로 활약한 한선 국(韓善國·1602∼?)의 작품이다. 그는 산등성이를 멀리 두고 폭포를 가까이 배치했는데, 바위틈에서 옆으로 뻗은 소나무를 기이하게 그려 선경 (仙境)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때가 때인지라 허유와 소부의 처신을 돌아본다. 정치와 권력이 더럽다고만 한다면 나랏일은 누가 맡을까. 정치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정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맞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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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니컬러스 케이지·테이어 레오니 주연, 125분, 미국, 2000년. 누구나의 마음속엔 가지 않은 길이 있다. 양 갈래 길에서 한쪽을 선택했던 순간에 대한 뒤늦은 후회 말이다. 이젠 너무 멀리 왔음에도 간 혹 그때를 돌이키며 아쉬워하는 건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인생에 '만약'이 허락된다면 어떨까. 영화 '패밀리 맨(The Family Man)'은 천사가 나타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미지의 여정을 보여준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잘나 가는 사업가이자 뉴욕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플 레이보이인 독신남 잭 캠벨(니컬러스 케이지)이 천사의 짓궂은 장난에 걸려든 남자다. 잭은 "필요한 게 뭐냐"는 물음에 "아무것도 없다"고 무심히 답하는 사람이다. 그는 페라리 자동차와 펜트 하우스처럼 세속의 성공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이 남자도 물론 갈림길 앞에 선 적이 있었다. 13년 전 열렬히 사랑했던 여자 친구(테이어 레오니) 대신 자신의 꿈을 좇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만약 그때 꿈 대신 사랑을 택했더라면? 천사는 그 '만약'의 세계로 잭을 이끈다. 그 '가상 리얼 월드'에 사는 잭은 멋진 싱글남이 아니라 애 둘을 키우는 평범한 동네 아저씨다. 스프 링이 삐거덕거리는 낡은 침대, 말썽꾸러기 어린아이들, 개를 끌고 나선 동네 산책, 할부금을 122번 더 부어야 온전히 내 것이 되는 변두리 작은 집, 시내 타이어 가 게 점원으로서의 지루하고 소박한 일과 식구가 모두 모인 거실의 왁자지껄한 평화. 그것들이 그의 인생 전부다. 화려한 인생을 구가하던 잭은 불행해진 걸까, 행복해진 걸까. 다시 나타난 천사는 잭에게 이제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슬쩍 보는 건 영원한 게 아니야." 잭은 절박하게 대답한다. "나한텐 아이가 있어. 집에 가야 해." 그때의 '집'이란 식구들이 가슴 졸이며 아빠 를 기다리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우리 집'이다. 후회 란 간절한 것이 있는 사람만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나는 한숨을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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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역사학 교수)
![]() 짜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인천 중구 선린동 차이나타운‘공화춘’의 1955년 모습.- 하루에 800만 그릇이 팔리는 '국민 음식' 짜장면의 모태(母胎)는 중국 산둥(山東) 지방의 토속음식인 '자장몐(炸醬麵)'이다. 음식은 사람과 함께 오게 마련이니, '자장몐'은 산둥 출신 화교( 華僑)들이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한 1880년대 중반 우리 곁에 왔다. 그러나 우리 입맛에 맞는 짜장면 은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1950년대 초반에야 탄생했다. 왜 이리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 궁금하다. 때론 사진 한 장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짜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인천 차이나타운의 공화춘 간판 우측에 걸린 '색판회석(色瓣會席·여자 접대부가 서비스하는 모임 장소)'이란 글씨가 말해주듯, 일제 강점기하 청(淸)요리집은 기생이 술을 따 르고 마작판을 벌일 수 있어 한량들이나 출입 하던 곳이었지 대중식당이 아니었다. 그렇기 에 통념과 달리 일제강점기하 공화춘 메뉴판 의 '특등요리(特等料理)'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허기를 달래던 '자장몐'은 들어 있지 않았다. '자장몐'이 중국인들만의 요깃거리에 머문 것은 1931년 만보산 사건을 빌미로 터진 중국인 배척이 말해주듯 조선인의 중국인에 대한 배타의식 탓이 컸다. 하지만 물 위에 뜬 기름마냥 토착인과 더 불어 살려하지 않는 중국인 특유의 고립주의도 작용 했다. 1920년이후 매년 2만명 이상 밀려든 산둥 출신 '쿠리(苦力·노동자)'들은 1930년 3월 25일자 조선일 보가 "도시의 모든 건축공사에서 지방 수리조합의 토목공사까지 중국인이 점령했다"고 기록할 만큼 방방곡곡에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들은 "올 적에 는 빈손 들고 왔으나 갈 적에는 큰돈을 갖고 간다" 는 매일신보 1930년 11월 14일자 보도처럼 돈은 물론 인정과 음식도 조선인들과 나누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은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25전쟁으로 화교 사회가 몰락 위기에 처한 시점에 태어났다. 미국이 원조해 준 밀가루로 고픈 배를 채우던 1950년대, 화교들은 그들만의 끼 니였던 '자장면'을 진화시켜 우리의 먹을거리를 풍 요롭게 해주었다. 그러나 잇단 화교 차별정책은 그 들이 우리 곁에 발붙이고 살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인종과 문화가 뒤섞이는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굴절 많았던 짜장면의 역사는 우리의 거울로 다가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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