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전쟁의 아픔

상기하자 6,25

핵무기 2014. 6. 26. 06:37




상기(想起)하자! 6.25한국전쟁



오늘은 6.25한국전쟁이 발발한지 꼭 64년쩨 되는 날입니다.
6.25전쟁은 셰계에서도 보기드문 동족 상잔의 비극입니다.

우리 나라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리어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해 옴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불리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가 거의 적의 손에 들어갈 찰라에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함으로써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이어 달아나는 공산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결국 1.4후퇴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렇세 하여 3년 1개월의 전쟁 끝에 휴전을 맞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6.25전쟁은 쌍방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1953년 7월 27일에 휴전되었으며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 상잔의 6·25 전쟁은 남. 북한의 전 국토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혔습니다.

6·25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 밀어닥친 온갖 외래 풍조는
혼란한 사회에서 잘못 소화되어 미풍 양속을 그르치는 예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자유와 평화를 찾아
월남한 300만 북한 동포의 필사적인 탈출이 자유의 소중함을
역력히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동족끼리 서로 싸우는 비극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유비 무환의 정신과 국력을 길러야 함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참전용사의 위훈과 명예 선양, 국민의 호국정신 및 안보의식을
더욱 고취시켜야 겠습니다.



▲ 1950. 7. 5. 한 국군 용사의 무덤.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



▲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 1951. 5. 20. 지게부대.



▲ 1950. 7. 7. 기마대 행렬.



▲ 1951. 4. 3. 강대국이 그어놓은 원한의 38선. 이 38선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던가!!



▲ 1950. 6. 18. 6.25 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7. 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파병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 1951. 1. 26. 미 폭격기들이 북한군 진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 1950. 7. 29 야간 전투 후 주간 취침.<



▲ 1950. 12. 9. 중공군의 참전으로 혹한 속에 후퇴하는 유엔군.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7. 29. 주야간 전투에 지친 국군 병사들이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고 있다.



▲ 1951. 4. 4. 홍성, 수로에 널브러진 유엔군 시신들.



▲ 1951. 7. 10. 적진을 향해 불을 뿜는 155mm 곡사포.



▲ 1951. 6. 3. 155mm 곡사포가 불을 뿜고 있다.



▲ 1951. 7. 3. 유리한 고지를 뺏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 1951. 9. 6. 금수강산을 초토화시킨 포탄 껍질들.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 1950.9.15 인천상륙작전



▲ 1950.9.15 인천상륙작전.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



▲ 1950. 9. 27.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서울 시가전



▲ 1950.9.28 중앙청에 태극기 계양하는 해병대용사들.



▲ 1950. 9. 29. 태극기 펄럭이는 중앙청>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10. 영동, 생포한 북한 측 유격대원들



▲ 1950. 3. 7. 미군이 중공군 포로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1950.6.28 서울시내의 인민군.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남하하는 피난민 행열













▲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 철원 노동당사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 1950. 8. 2. 금강철교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 1951.1.4 후퇴 피난민 행렬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모자'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



▲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



▲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고단한 피난 행렬.



▲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



▲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



▲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



▲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 부모잃은 전쟁고아

▲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



▲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



▲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



▲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



▲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



▲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2004 NARA



▲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



▲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



▲ 1950. 10. 1. 소공동 일대



▲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



▲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



▲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



▲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



▲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



▲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