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역사속의 인물들

40년전 오늘 피살된 육여사의 속옷

핵무기 2014. 9. 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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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오늘 피살된 陸 여사의 속옷


趙甲濟




3
년 전 오늘 중앙선데이는 당시 한나라당 비례대표 이애주(65·사진) 의원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그는 간호사 출신이다. 1969년부터 35년간 서울대 병원 간호사로 일했는데 대부분의 기간 VIP 병실 책임자였다. 이승만·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한 대한민국 모든 대통령을 서울대 병원에서 만났다고 한다.

중앙일보 기자가 李 의원에게 오랜 병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물었다. 1974 815, 북한에 포섭된 재일한국인 文世光(문세광)의 저격으로 죽은 陸英修 (육영수)여사의 경우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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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의원은,“한복 속옷을 기워 입으셨더라고요. 글쎄…”라며 陸 여사의 패티코트 얘기를 먼저 꺼냈다고 한다. 韓服(한복) 치마를 풍성하게 만드는 일종의 속치마가 패티코트다. 통상 한복을 맞출 때 한꺼번에 만든다. 하지만 陸 여사는 단을 덧대 3단으로 재활용한 패티코트를 최후의 순간에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듬성듬성 꿰맨 손바느질 흔적이 여기저기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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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1026일 저녁 金載圭(김재규)의 총을 가슴과 머리에 맞은 朴正熙 대통령은 金桂元(김계원) 비서실장에 의하여 국군보안사에 붙은 軍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긴급 소집된 군의관들이 심장소생술로 대통령을 살리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며칠 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合搜部(합수부)에서 조사를 받는다. 수사관은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 줄 몰랐는가'라고 묻는다. 정 대위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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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정보부)감시자들이 응급 처지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 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그해 11월 초 청와대 비서실 직원들은 朴 대통령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하여 2층 침실과 집무실을 조사하였다. 집무실內 화장실 변기 물통엔 벽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집무실엔 선풍기, 파리채, 부채가 있었다. 2층 침실 화장실 변기 물통에도 벽돌 한 장이 있었다. 물과 기름을 아끼자는 말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모범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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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세계최고-김정일의 식탁연구

dailynk(2005
6
)


6
월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5년이 되는 해다. 6일은 현충일이다. 한반도에 민주주의를 지켜려다 숨진 국군, 유엔군, 민간인이 수백만명에 이른다. 6.25 전쟁 55년이 지났지만 한반도에는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 있다. 북한의 23백만 주민들은 아직 수령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지금 북한에서는 제2의 식량난(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닥치고 있다. 북한 형제들이 올해를 어떻게 견뎌낼지 정말이지 걱정스럽다. 주민들이 또다시 풀죽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도 김정일은 전면적인 농업개혁을 미루고 있다. 주민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도 '장군님'의 식탁은 호화롭기 그지 없다
.

DailyNK
는 김정일의 식탁을 집중 해부했다. 김정일의 식탁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북한주민들의 비참한 삶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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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NK
는 김정일이 평소 즐기는 음식 30가지를 뽑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김정일의 개인 요리사를 지낸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요리사', 풀리코프스키가 쓴 '동방특급 열차', 그리고 김정일 주변에서 생활했던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

음식의 특징과 가격산출은 <신라호텔> 조리부의 협조를 얻었다
.

대아사 기간에도 희귀음식 구하려 외교관 동원


지난 2001년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가 북한을 탈출, 일본에서 <김정일의 요리인>(일본어판)을 출간하면서 김 위원장의 식탁에 어떤 음식이 즐겨 오르는지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후지모토는 김 위원장이 상어 지느러미 요리를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

이 음식은 김정일 식탁 차림표에서 야자상어날개탕, 죽생상어 날개탕, 상어날개 소라탕 등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식탁에 올랐다. 그가 공개한 2001 3 21-26일까지 김정일 식탁 차림표에서 상어 날개탕은 4차례나 메인 요리로 등장할 정도였다
.

탈북자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해산물을 즐긴다고 한다. 그렇다고 육고기 종류를 꺼리지는 않는다. 해산물을 주로 찾지만 '코야'(새끼돼지구이) '쌀로'(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돼지 비계) 같은 돼지고기 종류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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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많이 먹지 않고 시식하듯 조금씩 즐기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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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은 90년대 후반까지 파티를 자주 열고 술을 자주 마셨다. 그 당시에 가장 즐겨먹은 술은 ‘조니워커 스윙’과 ‘헤네시XO’로 알려졌다
.

후지모토의 증언 중에 매우 충격적인 사실은 북한 인민들이 기아로 수 십만 명이 떼죽음을 하던 96년에도 김정일의 요리사들은 음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는 것이다. 덴마크에서는 돼지고기, 이란에서는 캐비어, 일본에서는 주로 생선류, 동남아시아에서는 두리안, 파파야 등의 과일을 사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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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코프스키, 김정일 음식재료 비행기로 조달


김정일이 2001년 열차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림자 수행’을 했던 풀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전권 대사는 김정일과 함께 했던 여행을 ‘동방특급열차’라는 책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 책에서는 김정일과 24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식사와 음식을 주제로 나눈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상어 지느러미 요리는 빠지지 않는다. 그는 김정일이 먹는 음식의 재료는 북한에서 직접 비행기로 조달하고 여기서 나온 쓰레기도 밀봉하여 북한으로 보내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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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코프스키는 이 책에서 김 위원장이 자신에게 쌀로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며 향이 진한 커피를 자주 마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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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주변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한 탈북자는 “김정일이 우럭으로 국물을 낸 해장국을 즐겨 먹는 것으로 들었다”면서 “이것은 그가 술을 자주 먹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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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요리사, '재료주문과 동시 세계에서 속속 도착
'

같은해 프랑스 출신 요리사는 자신이 직접 북한에 들어가 김정일이 연 선상(船上) 파티에서 경험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20가지가 넘는 프랑스산 치즈와 포도주를 비롯해 요리에 필요한 재료는 주문과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즉시 들어왔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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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호텔 조리부 최인수 과장은 <데일리엔케이>와의 전화통화에서 '김 위원장이 먹는 음식은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가격 산정이 어렵다'면서 '전체 음식 중에 '뱀장어 캐비어(상어알)' 200만원을 호가할 것으로 보여 가장 비싼 음식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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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2002년 북한 어린이 수 천명의 영양 상태를 조사한 결과 40%가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에 있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1998년에는 그 수치가 60%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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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당국은 올해도 먹는 문제 해결에 사활을 걸고 있다. 1 1일 신년공동사설에서도 '사회주의경제건설의 주공(主攻) 전선을 농업전선'이라고 규정하고 식량증산을 촉구했다. 지난 28일 베이징에서 열린 국내외 대북지원 NGO회의에서는 '북한이 매년 500만 톤의 식량이 부족하고 올해만도 200만 톤이 부족한 현실'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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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도자 동지' 김정일은 인민들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데도 여전히 측근들과 호화 연회를 열면서 ‘원 모어(One more, 초밥이 맛이 좋다며 더 만들라는 지시를 내릴 때 사용한 말∙『김정일의 요리사』55페이지)를 외쳐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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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식탁 변화없이 북한 사회 변화도 불가능


김정일이 추천하는 음식 베스트 30을 선정한 이유를 아래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도령이 작성한 시조로 대신한다. 산해진미(山海珍味)로 가득한 김정일의 식탁을 바꾸지 않고 북한의 변화를 바라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金樽美酒千人血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 옥소반의 맛좋은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자료2: 아내와 아들의 죽음(월간조선 19997월호에 실렸던 북한주민의 수기에서 발췌
)

이밥에 고깃국을 먹어보았던 자기의 짧은 일생들을 끝없이 끝없이 되풀이하며 아버지가 장거리에서 사주었던 송편에 대하여 金日成의 생일날에 맛보았던 「선물」 사탕과자에 대하여…. 언젠가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두부장과 콩나물에 대하여…. 굶주리고 헐벗었던 모든 것은 다 버리고 잘 먹고 행복했던 짧은 인생을 간추려 맥이 빠져 잠드는 순간까지 재잘거리는 것이었다. 이런 숨막히는 생활의 세파 속에서 누이 동생이 굶어죽었고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어머니마저 나의 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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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쌍으로 안오고 禍()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누이동생의 죽음이 어머니를 거쳐 우리 집안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오랜 기간을 대용식품으로 이어온 이 나라의 사정은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나의 아들을 걷어갔다. 초인간적 힘으로 버텨오던 아내가 아들을 붙들고 통곡하다 그 자리서 숨져버렸다
.

아내와 아이를 붙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굶기는 피차일반이던 마을에서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묻어주려고 나서지 않았다. 묻어주는 일도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해야 나서는 세월이 그때였다
.

나는 어머니와 작별할 때도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머리를 고여 드릴 베개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베갯속을 꺼내 절구질을 힘겹게 하여 도토리가루 2g, 옥수수가루 한 줌을 넣어 죽을 쑤어 잡숫다 보니 베개 하나도 남기질 못했었다. 정말 우리 집안에 지옥문이 열려도 단단히 열렸던 1994년이었다
.
형님네 집에서는 군대에 갔던 조카가 영양실조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 죽는다 산다 야단이었고, 「이 세상은 개 같은 세상」이라고 했다는 형은 군 보위부에서 덮쳐간 후 소식이 없었다
.

기울어져 가는 저녁해처럼 이제 이 家門(가문)에 살아남은 자가 누구냐? 아니-이번에는 지옥에서 누굴 데려갈 거냐? 정말 시간문제였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두 딸애와 내가 우리 가문의 유일한 재산이었으니 그때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
나는 찬장 서랍에 있는 쥐약봉지를 생각했다. 평양시 용성구역에서 쥐약을 풀어 집안 식구를 먹이고 자기는 목을 매 죽은 ○○이가 떠올랐다. 그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먹어버리고 다 함께 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파리한 얼굴에 눈확이 꺼져 들어간 흐릿한 눈길로 행여나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딸들을 보니 차마 내 손으로 죽이자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범도 제 새끼는 안잡아 먹는다는 말이 그날처럼 나에게 공감을 주어보기는 일생 처음이다
.

우리 셋 중에서 죽으려면 내가 죽게 하고 저애들은 살아남게 해 주십사 하고 생각하였다. 그후 우리의 목숨은 끈질기게도 붙어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려도 그날까지 살아 있었으니 그날이 바로 잊혀지지 않는 1995 1115일이었다
.
막내딸 ○○이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변소에 가겠지 하고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막내딸이 방긋이 웃는다
.

『아버지, - 하세요』 하길래 멋도 모르고 입을 벌리는데 딸애의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펴지는 순간 쌀알 20 여알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쌀알을 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저 건너집 돼지우리 옆에 볏짚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펼쳐보니 벼알이 몇 알 있더라는 것이었다
.

딸애는 그 벼알 한 알 한 알을 손톱으로 까서 모아 가지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잡숫고 일어나야 우리가 산단다. 나는 딸애의 그 말에 심한 가책을 느끼며 그 귀여운 딸애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의 딸애가 정말 이 미련한 아버지보다 나았다. 나는 그 쌀알을 막내가 큰딸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거부하고 나섰다. 내가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쌀알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으니…. 그날 이 지구촌 위에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쌀알 나누어 먹는 신기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

딸애의 屍身에서 나온 비닐봉지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생겼다. 종전에 죽기만을 기다리던 방식에서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하여 무슨 짓인들 다 해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곰곰 누워서 생각하니 아파트 어느 1층집에 쥐이빨 강냉이종자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 골목을 누비다가 끝내 그 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창문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유리가 아닌 비닐방막이였다. 허기에 지쳤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먹이를 구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설다
.
나는 준비해 가지고 갔던 칼로 비닐을 째고 옥수수종자를 움켜 쥐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흥분으로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의 그 쾌감을 나는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艱難辛苦(간난신고) 끝에 옥수수종자를 떼내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비칠거리기는 했어도 가벼웠다. 이것이 내 일생에 처음으로 내짚은 도적생활이었다. 성공하고보니 나도 꽤 노력하면 훔쳐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그때부터 나는 어디에? 무엇을? 하며 손에 닿는 대로 가능성이 있는 대로 훔쳐내어 자식들을 먹여살리는 도적무리의 한 일원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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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우리 집에서는 근간에 보기 드문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눈물은 내려오고 밥술은 올라간다」는 격언이 틀리지 않았다. 연달은 초상으로 푹 꺼져 들어갔던 생기가 옥수수종자 다섯 이삭이 생기면서 집안에 和氣(화기)가 돌았다. 죽은 건 죽은 것이고 산 놈은 살아야 한다는 삶의 요구가 우리들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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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옥수수종자 한 이삭을 아이들에게 날 것으로 먹도록 배려해 주었다. 음식이 익는 동안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였는데 두 딸애는 그 돌덩이 같은 옥수수알을 맛있게 씹어먹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남은 긍지로 오랜만에 웃고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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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우리 세 식구는 빌어도 먹어 보고 훔쳐도 먹어보고 땅에서 주워도 먹어보면서 신성천~고원, 원산~단천 등지로 방랑하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민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직접 목격하면서 파리 목숨 같은 인생을 유지하였다
.

이 길 위에 고원에서 맏딸이 숨을 거두었고 그후 순천역의 쓰레기장에서 막내딸애의 시체가 발견되어 나를 질식케 하였다. 막내딸은 마지막까지 나의 곁에 남아 아버지께 충직했던 나의 혁명동지였으며 이 세상에서 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린 유일한 마지막 혈육이었다. 그의 屍身(시신)을 집에 가져다 헤쳐보니 그의 가슴속에는 깨끗한 비닐봉지에 정성 들여 골라놓은 배 껍질과 배 송치(편집자 注:씨가 들은 속), 명태껍질, 돼지뼈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함께 먹으려고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건사했을 딸애를 생각하여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딸애를 안장하고 그 비닐봉지를 입가에 얹어 주었다. 그때 나의 막내딸의 나이가 12세였다
.






[ 2014-08-15, 1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