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정치인들의 작태

문제兒,의 正體를 아십니까?

핵무기 2015. 6. 18. 07:37

 

문제兒,正體를 아십니까?



國保法 廢棄, 軍 無力化 主導하다 失敗

"
靑瓦臺 民政首席이었던 2003年 여름,

그는 國家保安法 廢止에
"기무司令官"총대를 메어달라 要求했다 합니다.

당시 "기무사령관"은 송영근,
지금은 새누리당 의원입니다.


그는 이번 新東亞(12月號)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후보가
안보 흔들기에 적극 참여했다.

여당 의원이 아니라 안보를 담당해온
군인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사실을 밝히겠다”며
당시의 秘話公開했습니다.


“2003년 여름 청와대에서 저녁을 같이하자고
하기에 갔더니 "노"대통령이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과
같이 있었다.

"노"대통령은
자신의 군생활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파할 때까지 특별한 당부가 없어 나는 ‘왜 불렀나’
생각했다.

그러나 만찬이 끝난 뒤 "문재인" 수석이 나더러
‘사령관께서 총대를 좀 메 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당시 "노"정부는 保安法 廢止주장했지만
송광수 검찰총장,
최기문 경찰청장
모든 공안 담당자가 다 反對해 꼼짝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를 불러 保安法 廢止에 앞장서달라고
한 것으로 보였다”

“민정수석실은 進級을 미끼로 기무사
모 실장을 회유해,기무사령관인 나의 언동을
감시하게 하고 기무사 내부 정보를 따로
보고하게 했다.


민정수석실에서는
변호사 출신의 전모 비서관과 기자 출신의
강모 행정관이 기무사를 담당했다.”

"문재인"
無力化 陰謀

“송영근 의원은 또 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던
‘군사법개혁’도 민정수석실 주도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군사법개혁안’이란 군에 검찰청을 만든다는
것이었는데 조영길 국방장관이 이에 反對하다가
물러났다.


지휘관의 관할권을 없애
에 검찰청을 만든다는 군사법개혁안이
의결안건으로 올라오자 조영길 국방장관과


유보선 차관, 남재준 육군,
문정일 해군, 이한호 공군,
김인식 해병대사령관까지

전원이
‘우리 군을 뿌리째 흔들려고 하느냐’며 강력히
반대해 부결시켰다
.”


事實알려지자
민정수석실이 상당히 격노했다고 하더라.

조영길 장관을 물러나게 한 것은
다...(중략) 윤광웅(노무현의 부산상고
동문) 씨를 거쳐 김장수 씨가 국방부 장관이 되자,

김장수 장관을 압박해 군 사법개혁안에
서명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노무현군사법개혁안이 확정됐다.

그러나 검찰이 공수처 신설에 反對
개혁안국회통과하지 못했다.
군사법개혁안도 함께 날아간 것이다.

兵力 縮小聯合司 解體에 이어 軍事法改革까지
確定됐다면 韓國의 安保體係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2003년 保安法 廢止 試圖로
始作해 軍事法改革案과 軍人事權 掌握으로 이어진


盧무현 정권의 軍部 흔들기는
우리 安保 體制를 뒤 흔드는 核爆彈이었다.

소신 있는 군인을 진급시키는게 아니라
거꾸로 정치인에게 잘 보이려는 군인이 진급하는
체제를 만들고 이를 합법화한 것이 노무현 정권이었다.

이 사건의 中心部에 "문재인" 후보가 있었다”
빨간 누더기 옷을 입은 "문재인"


"문재인"
NLL에 공동어로구역과 평화구역이라는 요상한
장난질을 계속하여 NLL 근방의 우리 수역을 사실상
북한에 왕창 떼어주겠다 벼르고 있습니다.


"문재인"
임수경과 같은 인간 이하의 미친 빨갱이와
백선엽장군매국노라 욕하고

노인들에게 욕설을 내 뱉은 순천 출신의 빨간 애송이
김광진을 캠프의 핵심인물로 영입하였습니다.


2011年 2月 12日 韓國日報와의 인터뷰에서는
“연방제가 희망”이라는 발언을 했고,

박왕자 피살 사건과 관련해서는
김정일이 현정은(현대)에게 구두로 신변보장을
약속했으면 됐지 이명박 정부가 그걸 믿지 하고
금강산 관광사업을 재개하지 않느냐는 참으로 어이없는
말도 했습니다.


1989년 동의대 학생들이
경찰관 7명을 불태워 죽인 事件해,

"문재인"
학생측을 옹호하는 변호를 했고,

2000년 민보상위가 생겨나
과거의 간첩, 빨치산, 국보법 범죄자들에게
‘民主化 人事라는 명예씌워주고


두둑한 보상금까지 국민세금으로 지급해 주는데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빨갱이입니다

(2012년10월25일 KBS보도).

한겨레신문의 초대 부산 지사장역임했고
(2012년10월17일 기자협회 신문 원성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