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전쟁의 아픔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 거제 포로수용

핵무기 2011. 3. 6. 17:55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 거제 포로수용//

                                                                 

거제도포로수용소(Geoje POW Camp)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당시

사로 잡은 북한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었던 거제도1951년부터 (현 거제시) 고현리,

수월리 등지를 중심으로 설치한 수용소이다.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하여

소련제 탱크를 앞에운 북한군이 남침하였으니

우리민족의 최대의 가슴아픈 역사가 시작 되었다.

북한군의 탱크가 남침하였으니~~

당시 우리에게는 이런 탱크한대 없었고~~

 

6,25 당시 전쟁과 관련된 인물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 장군,  리찌웨이 장군, 워커중장 등~~ 

중공의 모택동을 비롯한 인물들

우리나라 군인들의 모습

 

포로수용
디오라마관 - 포로의 노역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자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의 일방적인 석방으로 27,389명이 탈출하였다.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서 이곳에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이나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최근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장면은 6.25전쟁중 1.4후퇴 할때 평양의 대동강를

폭파시켜 북쪽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나오려고

부서진 다리 위를 타고 내려오는 피난민들의 장면을 어느 외국신문기자가

사진을 찍어놓은 것을 재현한 모습.

우리국군이 총을 겨누자 항복을 하고 나오는 모습

포로수용소를 미군들이 지키고~~ 

철조망속에서 포로들의 생활하는 모습

포로들은 수용소속에서 자치 생활을 하였다.

변소도 만들고 변도 스스로 퍼서 버리고 ~~  

 

 

 

포로수용소안에 목용탕은 없었으니

몸을 씻으려면 이런 방법을 하였겠지요~ 

때를 문지르는데  돌로 문질러 때를 씻었으니   

그당시엔 몸에 "이" 어찌그리도 많았는지?

"디디티" 라는 약을 몸에 뿌려 이를 없애고~~

포로수용소에서 몸에  디디티를 뿌리는 장면

 서로가 머리를 깎어주었으며

여자들의 포로도 있었으니

이러한 천막속에서 생활하였고~

스스로 옷을 재봉틀로 고쳐입고

 

 

포로들을 개성으로 싣고 가는 기차

이장면은 당시 반공포로와 북한으로 가려는 포로를

구분하기 위하여  개성에서 포로들을 설득하하는 장면이다.

북한에서는  북쪽으로 데려가려고 설득을 하였으나

많은 포로들은 북으로 가지않고 남쪽에 남았다.

 

이장면은 복쪽포로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

이 장바구니가 기억나십니까?

50년대에 주부들이 많이 들고 다니던

장바구니

군에서 사용하던 삐삐선이라는 전화선으로 만든 장바구니~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 폭동

1952년 5월 7일 발생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은

1952년 5월 7일부터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

포로들이 일으킨 일련의 소요사건으로 6월 10일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끝났다.

 

포로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F.T.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1 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

공산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폭행·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그해 6월 20일을 기하여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새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H. L.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6월 7∼10일에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등을 일으켰다.

보트너는 1952년 6월 10일부터 포로를 분산 수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으며,

6월 10일 도드 소장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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