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형제/보고 즐길거리

붉은 태양과 대지

핵무기 2013. 1. 14. 08:58

◈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이야기(39회)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
(포스텍 서양미술사 교수)



-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이수스의 전투'…
1529년, 목판에 유채, 158.4×120.3㎝,
뮌헨 알테피나코텍 소장. -


◆ 붉은 태양과 大地
세상은 그토록 광활한 것 ◆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1480?~1538)는 16세기 전반 독일의 화단(畵壇)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화가다. 그의 '이수스의 전투'는 
풍경을 성화(聖畵)나 역사화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징적 의미를 가진 존재로 격상시켰던 알
트도르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바이에른 
공국의 영주였던 빌헬름 4세가 주문한 것으로 당시 
레겐스부르크의 시의원이기도 했던 알트도르퍼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장직을 고사했다고 전해진다.
  이수스는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격전의 현장이다. 하지만 
빌헬름 4세는 고대의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기보다는 기 
당대에 서유럽 국가들이 베니스를 위협하던 오스만 제
국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림에 등
장한 병사들은 모두 16세기 스타일이다. 오른편 알렉
산더 진영의 병사들은 유럽식 갑옷으로 무장했고, 왼
편의 페르시아 병사들은 오스만의 복식(服飾)을 닮은 
붉은 외투에 하얀 터번을 썼다. 그 한가운데에 백마부
대를 이끌고 긴 창을 앞세워 전진하는 알렉산더와 그
에게 바짝 쫓기며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는 다리우스
의 전차(戰車)가 있다. 퇴각하는 페르시아 군대의 머
리 위로 어둠에 잠긴 초승달이 흐릿하게 빛난다. 페
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즉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제국이었고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의 
상징이 바로 초승달인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마치 지구 밖의 
위성에서 지중해를 내려다본 것 같은 장엄한 풍경이다. 
왼쪽부터 시나이반도, 홍해, 나일강 하류까지 이어진 
광대한 대지와 그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태양 아래서
는 승리를 거둔 알렉산더 대왕의 백만 대군도 그저 
깨알같이 소소하게 보일 뿐이다.

♣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
(미술평론가)


◆ 새 해가 뜬다, 세상이 기지개를 켠다 ◆


- '해맞이'…
유성업 그림, 비단에 채색, 30.8×24.7㎝,
17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오른쪽은 그림의 왼쪽 아래를 확대한 것. -

  어둠이 덮여도 빛은 기어코 돋는다. 
해는 오래됐지만 그 빛은 나날이 새롭다. 
어제 본 해라도 새해 새 아침을 여는 해는 
유난히 벅차다. 오늘의 사람은 옛적 해를 
보지 못해도 오늘의 해는 일찍이 옛적 사
람을 비췄으니, 일출(日出)을 맞는 느꺼움
이 옛 그림에도 남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 그림을 보라. 온 누리가 새 빛을 맞이하느라 
들떠 있는 정경이다. 붉은 해는 등마루 너머로 솟
는다. 첩첩 산봉우리들이 햇살을 받아 멀리서 가
까이서 잇따라 꿈틀거리고, 훤칠한 소나무와 뾰
족한 수목들은 한껏 팔 벌리며 기지개를 켠다.
  만상(萬象)을 이처럼 새로이 움트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새해 새벽이 뿜어내는 상서롭고 충만한 
기운이 그 노릇을 감당한다. 세상을 그렸으되 세상
에서 보기 어려운 광경이 이 그림에 담겨 있다. 바뀐 
해의 첫 아침이 모름지기 기적과 같은 풍경을 만들 
수 있는데, 화가는 거기에 간절한 바람까지 집어넣
었다. 그게 무얼까. 그림 위와 아래 옴팍한 곳에 집
들이 보인다. 위쪽은 대궐이 부럽지 않은 전각이다. 
으스대지 않고 단정한 좌향(坐向)이다. 아래쪽 집
은 울타리와 대문이 소박하고 초가지붕이 고즈넉
하다. 그래도 꿀리지는 않는 모양새다. 새날의 햇
빛이 대갓집과 여염집을 고루 비추어 화평하다.
  왼쪽 맨 아래로 눈을 돌리자. 자그마하게 그려진 
사람들이 있다. 둘은 보나마나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다. 때때옷 입은 손자는 떠오르는 해에게 손
짓한다. 할아버지도 고개를 돌린다. 조손(祖孫)
이 함께하는 해맞이가 다정하기 그지없다.
  그린 이는 조선 중기 사람인 유성업(柳成業)이다. 
그는 광해군 시절에 조선통신사를 수행해 일본에 건
너갔던 화원이다. 보기에 따라 흔한 연하장 같기도 
한 작품이지만, 계층과 세대를 아우르고자 한 작의
(作意)가 신통하다. 새해 들면 누구나 꿈꾼다. 
뜻해야 만사를 이룬다.
♣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
(경희대 역사학 교수)


◆ '말죽거리 신화'의 뒤에는 북한 있었다 ◆


- 나룻배는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옆을 -
1969년 겨울 지금의 용산구 한남동 한강변에
있었던 한강진 나루터에서 자동차와 사람을 싣고
떠나는 나룻배 뒤로 준공을 앞둔 한남대교
(제3한강교)의 모습이 보인다.

 
  서울 강남 개발의 신호탄은 한남대교(제3한강교)
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알려져 왔다. 1967년 12월 
7일자 조선일보의 기사 '뻗어날 길에 먼저 뛰는 땅값'
이 이를 대변한다. "경부고속도로의 제1공구(서울~수
원간) 노선이 대체적으로나마 밝혀짐에 따라 시발점인 
남부 서울 말죽거리 일대의 땅값은 하루가 멀게 치솟고 
있다. 지금은 서울시로 편입된 양재동 일대 번화가래야 
50~60개의 점포밖에 없는 이 고장에 무려 34개의 복덕
방이 붐비고 있다. '제3한강교가 놓이기만 하면 
이곳에 고층건물이 들어설 게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한남대교 준공 두 해 전, 
경부고속도로 착공 두 달 전에 나간 이 보도는 
반쪽의 진실만 담고 있다. 착공 당시 이 다리가 
'말죽거리 신화'의 주역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1966년 1월 19일 서울시의 '남서울계획'에 따라 공
사가 시작된 이 다리의 진짜 용도는 '유사시 도강(渡
江)용'이었다. 6·25전쟁이 터진 지 3일 만에 폭파된 
한강 인도교와 1·4후퇴가 서울 시민들에게 남긴 기
억의 상흔(傷痕)은 컸다. 인구는 1950년보다 갑절 
이상 늘어난 379만명을 상회했지만, 1965년 준공
된 양화대교는 군(軍) 작전용이었기 때문에 남침 
시 시민들이 건널 수 있는 한강 다리는 여전히 
두 곳뿐이었다.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은 북한의 남침에 대한 공포에 불을 댕겼다. 한 해 
뒤 정부가 '싸우며 건설하는 해'를 선언하자, 서울시는 
'서울 요새화 계획'과 '방어 및 관광 목적의 북악 스카
이웨이' 건설 계획으로 화답하였다. 1969년 12월 26일
한남대교의 준공과 함께 서울시가 한강 남쪽에 '제2 
서울' 건설 계획을 발표한 이면에도 북한의 위협에 대
한 공포가 짙게 배어 있다. 또 남북 간의 체제 경쟁도 
강남 개발에 한몫하였다. 이는 차량 보유 대수가 2만
8000대에 불과하던 당시 착공 3개월 만에 차선을 두 
개 늘려 한남대교를 왕복 6차선 교량으로 설계를 바
꾼 이유가 웅변한다. 그때 거센 반대를 무릅쓴 결정
은 미래를 내다본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아니라 평
양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4차선 옥류교에 뒤질 
수 없다는 경쟁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