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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게재된 미술,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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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텍 서양미술사 교수)
◆ 붉은 태양과 大地 세상은 그토록 광활한 것 ◆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1480?~1538)는 16세기 전반 독일의 화단(畵壇)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화가다. 그의 '이수스의 전투'는 풍경을 성화(聖畵)나 역사화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징적 의미를 가진 존재로 격상시켰던 알 트도르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바이에른 공국의 영주였던 빌헬름 4세가 주문한 것으로 당시 레겐스부르크의 시의원이기도 했던 알트도르퍼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장직을 고사했다고 전해진다. 이수스는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격전의 현장이다. 하지만 빌헬름 4세는 고대의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기보다는 기 당대에 서유럽 국가들이 베니스를 위협하던 오스만 제 국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림에 등 장한 병사들은 모두 16세기 스타일이다. 오른편 알렉 산더 진영의 병사들은 유럽식 갑옷으로 무장했고, 왼 편의 페르시아 병사들은 오스만의 복식(服飾)을 닮은 붉은 외투에 하얀 터번을 썼다. 그 한가운데에 백마부 대를 이끌고 긴 창을 앞세워 전진하는 알렉산더와 그 에게 바짝 쫓기며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는 다리우스 의 전차(戰車)가 있다. 퇴각하는 페르시아 군대의 머 리 위로 어둠에 잠긴 초승달이 흐릿하게 빛난다. 페 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즉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제국이었고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의 상징이 바로 초승달인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마치 지구 밖의 위성에서 지중해를 내려다본 것 같은 장엄한 풍경이다. 왼쪽부터 시나이반도, 홍해, 나일강 하류까지 이어진 광대한 대지와 그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태양 아래서 는 승리를 거둔 알렉산더 대왕의 백만 대군도 그저 깨알같이 소소하게 보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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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 유성업 그림, 비단에 채색, 30.8×24.7㎝, 17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오른쪽은 그림의 왼쪽 아래를 확대한 것. - 어둠이 덮여도 빛은 기어코 돋는다. 해는 오래됐지만 그 빛은 나날이 새롭다. 어제 본 해라도 새해 새 아침을 여는 해는 유난히 벅차다. 오늘의 사람은 옛적 해를 보지 못해도 오늘의 해는 일찍이 옛적 사 람을 비췄으니, 일출(日出)을 맞는 느꺼움 이 옛 그림에도 남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 그림을 보라. 온 누리가 새 빛을 맞이하느라 들떠 있는 정경이다. 붉은 해는 등마루 너머로 솟 는다. 첩첩 산봉우리들이 햇살을 받아 멀리서 가 까이서 잇따라 꿈틀거리고, 훤칠한 소나무와 뾰 족한 수목들은 한껏 팔 벌리며 기지개를 켠다. 만상(萬象)을 이처럼 새로이 움트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새해 새벽이 뿜어내는 상서롭고 충만한 기운이 그 노릇을 감당한다. 세상을 그렸으되 세상 에서 보기 어려운 광경이 이 그림에 담겨 있다. 바뀐 해의 첫 아침이 모름지기 기적과 같은 풍경을 만들 수 있는데, 화가는 거기에 간절한 바람까지 집어넣 었다. 그게 무얼까. 그림 위와 아래 옴팍한 곳에 집 들이 보인다. 위쪽은 대궐이 부럽지 않은 전각이다. 으스대지 않고 단정한 좌향(坐向)이다. 아래쪽 집 은 울타리와 대문이 소박하고 초가지붕이 고즈넉 하다. 그래도 꿀리지는 않는 모양새다. 새날의 햇 빛이 대갓집과 여염집을 고루 비추어 화평하다. 왼쪽 맨 아래로 눈을 돌리자. 자그마하게 그려진 사람들이 있다. 둘은 보나마나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다. 때때옷 입은 손자는 떠오르는 해에게 손 짓한다. 할아버지도 고개를 돌린다. 조손(祖孫) 이 함께하는 해맞이가 다정하기 그지없다. 그린 이는 조선 중기 사람인 유성업(柳成業)이다. 그는 광해군 시절에 조선통신사를 수행해 일본에 건 너갔던 화원이다. 보기에 따라 흔한 연하장 같기도 한 작품이지만, 계층과 세대를 아우르고자 한 작의 (作意)가 신통하다. 새해 들면 누구나 꿈꾼다. 뜻해야 만사를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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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역사학 교수)
1969년 겨울 지금의 용산구 한남동 한강변에 있었던 한강진 나루터에서 자동차와 사람을 싣고 떠나는 나룻배 뒤로 준공을 앞둔 한남대교 (제3한강교)의 모습이 보인다. 서울 강남 개발의 신호탄은 한남대교(제3한강교) 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알려져 왔다. 1967년 12월 7일자 조선일보의 기사 '뻗어날 길에 먼저 뛰는 땅값' 이 이를 대변한다. "경부고속도로의 제1공구(서울~수 원간) 노선이 대체적으로나마 밝혀짐에 따라 시발점인 남부 서울 말죽거리 일대의 땅값은 하루가 멀게 치솟고 있다. 지금은 서울시로 편입된 양재동 일대 번화가래야 50~60개의 점포밖에 없는 이 고장에 무려 34개의 복덕 방이 붐비고 있다. '제3한강교가 놓이기만 하면 이곳에 고층건물이 들어설 게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한남대교 준공 두 해 전, 경부고속도로 착공 두 달 전에 나간 이 보도는 반쪽의 진실만 담고 있다. 착공 당시 이 다리가 '말죽거리 신화'의 주역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1966년 1월 19일 서울시의 '남서울계획'에 따라 공 사가 시작된 이 다리의 진짜 용도는 '유사시 도강(渡 江)용'이었다. 6·25전쟁이 터진 지 3일 만에 폭파된 한강 인도교와 1·4후퇴가 서울 시민들에게 남긴 기 억의 상흔(傷痕)은 컸다. 인구는 1950년보다 갑절 이상 늘어난 379만명을 상회했지만, 1965년 준공 된 양화대교는 군(軍) 작전용이었기 때문에 남침 시 시민들이 건널 수 있는 한강 다리는 여전히 두 곳뿐이었다.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은 북한의 남침에 대한 공포에 불을 댕겼다. 한 해 뒤 정부가 '싸우며 건설하는 해'를 선언하자, 서울시는 '서울 요새화 계획'과 '방어 및 관광 목적의 북악 스카 이웨이' 건설 계획으로 화답하였다. 1969년 12월 26일 한남대교의 준공과 함께 서울시가 한강 남쪽에 '제2 서울' 건설 계획을 발표한 이면에도 북한의 위협에 대 한 공포가 짙게 배어 있다. 또 남북 간의 체제 경쟁도 강남 개발에 한몫하였다. 이는 차량 보유 대수가 2만 8000대에 불과하던 당시 착공 3개월 만에 차선을 두 개 늘려 한남대교를 왕복 6차선 교량으로 설계를 바 꾼 이유가 웅변한다. 그때 거센 반대를 무릅쓴 결정 은 미래를 내다본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아니라 평 양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4차선 옥류교에 뒤질 수 없다는 경쟁심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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