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서 한국이 살아남은 |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격적으로 처 내려온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에서, 한국은, 그때 누가 보아도 패하고, 결국 그 후의 베트남처럼 망하게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1) 그때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 밖에 위치해 있었다. 해방 후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완전히 철수한 후,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1950년 1월 ‘한반도 미국 태평양
방위선에서의 제외’발언이 나왔었다. 2) 북의 김일성은 한반도의 무력을 사용한 공산화 통일을 위해 먼저 철저하게 준비를 했었다. 먼저 ‘소련’ 스탈린의 허락을 받고, 중국 모택동의 협력을 약속 받았다. (3) 반면, 대한민국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국방은 한마디로 ‘오합지졸’ 상태였다. (4) 그리하여 탱크 한대도 없었던, 전방부대는 탱크를 앞세워 처 들어 오는 인민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고,
결국 사흘 후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는 부산 일원만 겨우 남고, 전국이 북한군의 군화에 짓밟히게 되었다. 김일성의 승리는 확실하게 보였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대한민국이란 ‘남한’이 망하지 않고 ‘살아 남은 것’(survived)이야말로 정말 ‘기적’이다. ◆ 첫째는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미군 참전 결심이다.
미국이 침공 받은 것도 아닌데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빨리 미군의 한반도 투입을 결심했다는 것은 기적이다. ◆ 둘째는
유엔 상임 이사국 회의에서 유엔이 ‘참전’ 결의할 때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이었다. 소련대표가 그때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의 참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 셋째는
그때 미군이 가까운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미국 본토에서 미군을 함정으로 이동하려 했다면,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을 것이다. ◆ 넷째는, 북한 침공군이 서울을 정령 한 후, 약 1 주일간을 이유 없이 지체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다섯째는, 여름에 한반도는 비가 많은 우기, 장마의 계절인데, 그 해의 여름은 대체로 날씨가 계속 좋아서
미군의 항공기가 거의 매일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항공력이 약한 북한군은 강력한 미군의 항공력에 무력화되었었다. 끝으로, 나 자신은 그때 어렸었지만, 자신이나 우리 가족이, 1,4 후퇴 때, 그 혹독한 1월의 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피란 가며, 얼어 죽지 않고, 또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도 하나의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여러 ‘기적’같은 일들은 다 우연이었을까? **(6월 24일 새벽에)**
한국감리교신학대 졸업, 美 SMU(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신학석사(M.Th.), 美Princeton T.S. 수학, 美 Drew University 목회학박사(D.Min.)/ 해병대 정훈.공보장교, 해군 군종차감/ 美 UMC 정회원 및 이민목회,북가주TV방송 이사장, (서울) 감신대 객원교수, 필그림 이민목연 대표(現), 자유통일포럼 논설위원(現), IPF(국제언론인 포럼) 편집위원(現), 미주감신대 초빙교수(現)/ 이메일: petertk28@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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